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홍사덕 나이 사망 프로필 국회부의장 별세 생애 유족 가족 자녀 이건희

by 제로스 2023. 10. 21.
반응형
728x170

국회의원 홍사덕 프로필

홍사덕 나이 학력 고향 가족관계 경력 군대 병역

출생

1943년 3월 5일

홍사덕 고향 경상북도 영주군

(現 경상북도 영주시)

사망

홍사덕 나이 2020년 6월 17일 (향년 77세)

본관

남양 홍씨 토홍계

재임기간

제16대 전반기 국회부의장

2000년 6월 5일 ~ 2001년 6월 4일

홍사덕 부인 아내 배우자 와이프

홍사덕 결혼 임경미

홍사덕 자녀 자식 아이 아기

슬하 1남 2녀

홍사덕 종교

개신교

홍사덕 학력

영주초등학교 (졸업)

영주중학교 (졸업)

서울대학교사범대학부설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외교학 / 학사)

홍사덕 군대 병역

대한민국 해병대 병장 만기 제대(130기)

의원 선수

6

의원 대수

11, 12, 14, 15, 16, 18

홍사덕 경력

중앙일보 기자

한국기자협회 부회장

롯데 평화건설 기획실장

신한민주당 대변인

제11, 12, 14~16, 18대 국회의원

민주당 부총재

정무제1장관

제16대 국회 상반기 국회부의장

한나라당 원내총무

친박연대 선거대책위원장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상임의장

출생: 1943년 3월 5일 (77세), 영주시

홍사덕 책 저서: 지금 잠이 옵니까?, 우리가가야하는길, 나의 꿈 나의 도전, 홍 사덕 이 젊은이들 에게 꼭 하고 싶은 말

학력: 서울대학교 (1961년–1968년)

자녀: 홍재선

​출생

1943년 3월 5일

경상북도 영주시

사망

2020년 6월 17일 (향년 77세)

본관

남양 홍씨

재임기간

제16대 전반기 국회부의장

2000년 6월 5일 ~ 2001년 6월 4일

홍사덕 전 사회기관단체인, 전 국회의원

출생-사망

1943년, 경상북도 영주 - 2020년 6월 17일

학력

서울대학교 외교학 학사

경력

2012.02~2012.05 제18대 국회의원 (대구 서구/새누리당)

2002 한나라당 원내대표

2000.06 제16대 국회 부의장

홍사덕 생애

​홍사덕(洪思德, 1943년 3월 5일 ~ 2020년 6월 17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대한민국 해병대 사병으로 복무한 그는 6선 의원을 지낸 정치인이다.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중앙일보 기자를 거쳐 1981년 제11대 민한당 국회의원으로 정치를 시작하였다. 한나라당 원내총무를 지냈으며,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 국회통과의 주역이었다. 그 후 낙선운동 대상으로 지목되어 17대 총선에서 낙선했으나 18대 총선에서 대구 서구에서 친박연대 후보로 나와 당선되었다. 선거 이후 친박 의원들의 일괄 복당을 허용한다는 한나라당의 방침에 따라 한나라당에 복당했다.

홍사덕 출신 학교

1955년 영주초등학교 졸업

1958년 영주중학교 졸업

1961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졸업

1961년 ~ 1968년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홍사덕 학창시절

1955년 영주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58년 영주중학교를 졸업했다. 1961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1년 서울대학교 외교학과에 입학하여 1968년 서울대학교 졸업했다.

1968년 졸업후 중앙일보에 입사하여 기자생활을 하였다. 이후 중앙일보 기자, 한국기자협회 부회장을 지냈다. 그 뒤 신민당 대변인을 하기도 했다. 신민당 대변인 시절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즉석 논평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방송에도 출연하여 방송 정치평론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홍사덕 병역 군대

서울대학교 외교학과에 재학중이던 지난 1962년 해병대에 자원 입대(130기)해 2년간 사병(의장대원)으로 복무했으며, 서울대 출신으로는 첫 해병대 사병으로 홍 의원의 아들도 해병대 702기 출신이다.

홍사덕 정치 입문

81년 11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어 민한당 국회의원이 되었다.80년대 중반 소위 ‘이민우 구상’으로 신민당을 망하게 했다는 의견도 있다. 그 뒤 신민당 대변인, 민주당 부총재, 민주당 대변인 등을 지냈다.

홍사덕 5공, 6공화국 시절

1985년 12대 총선 이후 사실상의 관제 야당이었던 민한당을 흡수한 신한민주당(신민당)은 100여석의 거대야당으로 탈바꿈하여 직선제개헌을 모토로 내걸고 제5공화국에 대한 선명투쟁을 선언하였다. 당시 김영삼 김대중 양김씨가 정치규제에 묶여있었기 때문에 신민당의 총재는 이민우가 맡고 있었지만, 실권은 거의 없었다. 홍사덕은 이런 이민우 총재 밑에서 당대변인을 맡아 소장파 재선 의원이지만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1986년 민정당의 내각제와 신민당의 직선제 개헌안이 합의점을 못찾아 정국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그러자 신민당 총재인 이민우는 "민주화조치가 선행되면 내각제도 수용할 수 있다"는 소위 이민우 구상을 들고 나왔다. 이는 사실상 홍사덕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당내 최대 지분을 소유하고 있던 양김씨는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이러한 불협화음은 곧 진정되었으나 이민우, 이철승과 같은 대여타협파와 양김씨가 주도한 선명투쟁파간의 알력은 심화되어 당내 내분은 증폭되었다. 결국 1986년 양김씨는 더이상 신민당내의 대여 타협론자들과 함께 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소속 의원들을 탈당시켜 통일민주당을 창당하였다.

1988년 13대 대선 이후에는 반(反) 양김 노선을 주장했다가 14대 대선을 앞두고는 민주당에 입당하여 김대중 후보 진영의 대변인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직선제 개헌 이후 양김이 분열하자, 홍사덕은 무소속의원으로 있다가 13대 총선에서 서울 강남구 을에 출마해 이태섭에게 패하고 원외로 밀려났다. 그러던 중 1990년 삼당합당을 거부한 이기택이 주도하는 민주당(소위 꼬마민주당)에 노무현, 박찬종 등과 함께 참여하였고, 1991년 민주당과 김대중이 이끄는 신민당과 합당하여 통합 민주당을 창당하자 이에 합류하여 제14대 국회의원(서울 강남을)에서 당선되었다.

 

한편 그는 국군보안사령부의 사찰대상 중 한사람이 되어 노태우 정부로부터 감시당하였는데, 1990년 10월 4일 오후 6시 40분쯤 외국어대 재학 중 민학투련 출신이었던, 탈영병 윤석양 이병의 폭로에 의해 밝혀졌다. 윤석양은 탈영후 서울시 연지동 기독교회관 7층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양심선언」을 통해 탈영당시 보안사에서 갖고나온 동향파악대상자 개인색인표 신상철, 이들 내용이 입력된 컴퓨터디스킷을 공개했다.

1990년대 이후

그러나 1995년 지방선거 이후 김대중이 정계에 복귀하면서 통합민주당에서 소속의원들을 탈당시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홍사덕은 이에 반발하여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하지 않고 무소속으로 남았다. 1996년 15대 국회의원선거에서 강남구 을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7년 무소속 의원 신분으로 문민정부의 마지막 정무장관으로 입각하기도 했으나 당시 여당이었던 신한국당에 입당하지는 않았으며, 1998년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2000년 초까지 무소속으로 의정활동을 하였다. 1999년 운석 장면 기념회 감사를 지냈다.

한나라당 입당 이후

2000년 1월 19일 장기표와 함께 '1인 보스정치와 지역주의 타파’를 내걸고 가칭 ‘무지개연합’ 창당을 선언하였으나, 8일 만에 무지개연합이 해체되며 이때 무지개연합을 망하게 했다는 말이 있다. 1월 27일 돌연 한나라당에 입당하였다.이를 놓고 그가 주장해온 1인 보스정치 청산의 종착역이 한나라당이었냐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입당 직후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부총재와 함께 제16대 국회의원 총선거 한나라당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고, 한나라당 비례대표 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2000년 6월 5일 국회 부의장이 되었다.2004년 한나라당 원내총무로서 민주당 유용태 원내총무와 함께 노무현대통령 탄핵안을 통과시켰다.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열린우리당 한명숙 후보에게 근소한 표차로 패배하였다.

2005년 경기도 광주시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공천을 신청하였으나 한나라당이 탄핵의 역풍이 가라앉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진섭을 전략공천하자, 이에 불복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하였다가 낙선하였다.

2007년 안병훈 도서출판 기파랑 대표와 함께,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나 여전히 탈당한 상태라 선거 운동 당시 그 자격 여부를 놓고 논란이 있었다. 7월에 복당 신청을 하였으나 이명박 후보측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2007년 7월 30일 대통령 후보자 이명박은 반드시 진다는 이명박 필패론을 말했다가 이명박 전 서울시장측 박형준 대변인에게 망당(亡黨)전문가 홍사덕, 정권 교체를 또 가로막나는 말을 들었다.

2008년 3월, '친박연대'의 공동 선대위원장을 맡고, 제18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한나라당의 텃밭인 대구 서구에 출마하자, 한나라당과 진보신당 대구지부로부터 정치도의를 모른다, 철새다 등의 맹비난을 받았다.

선거에서 한나라당 이종현 후보를 60% 이상의 압도적인 지지율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당선된 후 한나라당에 복당하였다. 2012년 4월 제19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서울 종로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2012년 10월 29일,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홍사덕 의정 활동

11대 민한당 국회의원(경북 영주시, 영풍, 봉화, 영양군)

12대 신민당 국회의원(경북 영주시, 영풍, 봉화, 영양군), 신민당대변인, 국회운영위원회 위원, 민주당 부총재

14대 민주당 국회의원(서울 강남구을), 국회노동위원회 위원, 민주당 대변인

15대 한나라당 국회의원(서울 강남구을), 정무제1장관, 한나라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

16대 한나라당 국회의원(비례대표), 제16대 국회 부의장, 한나라당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위원장, 국회통일외교통상위원회 위원, 한나라당 원내총무

18대 새누리당 국회의원(대구 서구),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

홍사덕 언행

2012년 8월 29일 "유신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한 게 아니라 수출 100억 달러를 넘기기 위한 조치였다"

2012년 7월 11일 "5·16에 관한 평가를 박근혜 전 대표에게 묻는 것은 세종대왕에게 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세운 게 역성혁명이냐 군사쿠데타냐고 묻는 것과 같다"[2012년 7월 "박근혜 전 위원장 반경 몇 미터 안에 김종인 위원장을 빼고는 55세 이상을 들이지 말아라"

홍사덕 가족 관계 집안 유족

배우자 : 임경미

아들 : 홍재선

며느리 : 손욱

장녀 : 홍은진

첫째 사위 : 조정익

차녀 : 홍세나

둘째 사위 : 정해인

장인 : 임문환 (1907년 6월 11일 ~ 1993년 6월 19일)

홍사덕 저서

《지금, 잠이 옵니까?》

《나의 꿈, 나의 도전》

대한민국의 정치인. 6선 관록의 정치인이자 친박의 대표 인물. 16대 국회 상반기 국회부의장을 지냈다.1943년 경상북도 영주군에서 태어났다. 영주초등학교, 영주중학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외교학과를 졸업하였다.대학 재학 중 대한민국 해병대에 입대하여 의무복무하였다. 졸업 후 중앙일보 기자로 일하였다.

홍사덕 리즈 시절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상북도 영주시-영풍군-봉화군-영양군 지역구에 민주한국당 후보로 출마하여 민주정의당 오한구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84년 말 서석재, 박관용, 김찬우, 허경만, 김현규, 손정혁, 최수환 등과 민주한국당을 탈당하여 신한민주당에 입당하였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민주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고, 같은 해 신한민주당 대변인이 되었다. 이민우 총재의 측근으로 활동했는데, 이민우 구상이 홍사덕의 아이디어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박찬종, 이철, 허경구, 조순형, 장기욱 등과 함께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 양쪽 모두에 합류하지 아니한 채 야권 단일화를 주장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지역구를 서울특별시 강남구 을로 옮기고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민주정의당 이태섭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1990년 꼬마민주당에 합류하였고, 야당이 통합되면서 민주당 소속이 되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강남구 을 선거구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대중 후보 선거대책위원회의 대변인을 맡기도 했다. 이 때의 인연으로 김대중과 친분이 각별했으며, 한때는 동교동계 주변의 몇 안되는 영남 출신으로서 당 내에서 입지를 얻기도 했다. 1994년부터 1996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환경노동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95년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 나섰으나 조순, 조세형, 이철 후보와 맞붙어 3등으로 낙선했다. 김대중이 정계에 복귀하여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따라갔다가 바로 탈당하였다.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같은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4선 의원이 되었다. 같은 해 지금 잠이 옵니까라는 저서를 출판하였다. 1997년 김영삼 정부의 정무제1장관에 임명되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장기표와 함께 무지개연합이라는 신당 창당을 추진하다가, 뜬금없이 한나라당에 입당하였다. 홍사덕 창당 선언 '작심 1주일'당시 통일부 장관을 맡고 싶다면서 새천년민주당 쪽과도 접촉했었다고 한다. 권노갑 증언 최종 발표 직전까지 계속 간을 보고 있었던 듯.

지역구를 오세훈에게 넘겨주고 전국구 2번을 배정받아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국회부의장에 선출되었으나, 2001년 부의장직을 사임하고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 나섰다. 그러나 2002년 3월 7일자 중앙일보의 대의원 조사에서 지지율이 36.5%으로 53.1%인 이명박에게 크게 뒤처지는 결과가 나오자, 경선을 포기한다. 당시 "이명박이 당내 경선에서 대의원들을 상대로 지나치게 '물량' 공세를 펴는 것에 홍사덕이 크게 분노했다"는 얘기가 돌았고, 홍사덕은 기자회견을 열어 "이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서울시장 선거에서 반드시 보여 주겠다"고 무소속 출마를 시사하기도 했으나 지도부의 만류로 무소속 출마는 실행되지 않았다.

2003년 한나라당 원내총무(지금의 원내대표)에 선출되어, 이라크 파병하면 한달 동안 사병으로 근무하겠다는 소리를 했다. 심지어 재입대를 하겠다며 입대 자원서를 제출했으나, 병무청 측이 '나이가 너무 많아서 안된다'며 퇴짜.2004년 1월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의 대북정책이 같다고 말하는 것은 김 전 대통령에게 큰 결례다.”며, “김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은 북한의 개혁 개방 자유화 민주화를 궁극적 목표로 삼고 있는데 노 대통령의 대북정책에서는 이를 찾아볼 수 없다.”, “김 전 대통령은 통일 후에도 한반도에 주한미군이 필요하다는 말을 할 정도로 한미안보에 대해 확고한 철학과 신념을 가지고 있었는데 노 대통령은 철학도 신념도 없이 한미 관계를 망가뜨렸다.

이라크 추가파병도 일본은 미국의 신뢰를 얻고 파병시간을 벌었으나, 우리 정부는 미국 기분을 상할대로 상하게 해놓고 보내는 시기는 일본과 같지 않느냐”고 당시 노무현 정부를 비판했다.이어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를 주도하고, 그해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갑(현 일산동구) 지역구에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열린우리당 한명숙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05년 재보궐선거에서 경기도 광주시 지역구 국회의원 후보 공천을 신청하였으나 탈락하였다. 이에 불복하고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정진섭 후보에 밀려 또 낙선하였다.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박근혜의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고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한나라당 공천에서 탈락하여 친박연대 후보로 대구광역시 서구 지역구에 출마, 당선된 후 한나라당에 복당하였다. 한편, 2009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하였을 때 한국일보에 "DJ - '사회복지 원년' 대통령"이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종로구 선거구에 새누리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민주통합당 정세균 후보에 패하여 낙선하였다. 2013년 정치자금법위반죄로 벌금 300만원과 추징금 3000만원을 선고받았다.이후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의장으로 있다가 주한미국대사 피습 사건으로 사의를 표했지만 수리되지 않았고, 정권교체로 물러날 때까지 민화협 대표상임의장직을 수행했다. 2016년 북한 대홍수 사태에 대해 인도적 대북지원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2017년 정권교체 이후 완전히 정계를 은퇴했다. 정계를 은퇴하면서 자유한국당도 탈당했고, 자유한국당의 상임고문직조차 받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당 대표가 된 홍준표와 홍사덕 간 관계가 나빠서 탈당했다는 말이 있었다.

홍사덕 이건희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과는 서울사대부고 동기 동창이며, 절친한 사이로 알려져있다. 몇몇 일화를 살펴봐도 절친이라는 걸 알 수 있다.10월 유신을 과도하게 칭송했다가 비판 받았다. 유신정권은 강성 수출을 위한 수단이라고 말했는데, 1970년대 유신정권 시절은 인플레이션이 극심하던 시대였다. 2차 석유파동으로 대한민국 자체가 아예 망할 뻔 했다. 대외적으로 수출 100억 달러니, 1000억 달러니 나왔지만, 실질적인 국민 소득이 매년 감소했다. 당장 보릿고개가 1970년대 중반까지 존재했을 정도로 유통망 자체도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이였으니까 말이다.

홍사덕 선거 이력

1981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9선거구)

민주한국당

21,199 (14.78%)

당선 (2위)

초선

1985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영주·영풍·영양·봉화)

신한민주당

35,828 (24.10%)

당선 (2위)

재선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강남 을)

무소속

34,746 (30.39%)

낙선 (2위)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강남 을)

민주당

64,201 (52.24%)

당선 (1위)

3선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강남 을)

무소속

30,601 (26.06%)

당선 (1위)

4선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한나라당

-

당선 (2번)

5선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고양 일산 갑)

한나라당

45,936 (46.61%)

낙선 (2위)

2005

하반기 재보궐선거

(경기 광주 국회의원)

무소속

17,812 (30.8%)

낙선 (2위)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대구 서)

친박연대

52,713 (61.77%)

당선 (1위)

6선

2012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종로)

새누리당

36,641 (45.89%)

낙선 (2위)

홍사덕 사망 이유 사유 원인 홍사덕 별세 숙환

홍사덕 전 국회부의장이 17일 밤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77세.고인은 최근 폐렴으로 입원 치료를 받아왔던 것으로 전해졌다.

중앙일보 기자 출신인 고인은 1981년 제11대 민주한국당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해 18대까지 6선을 했다. 1992년 대선에서는 민주당에서 김대중 후보 캠프 대변인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김영삼 정부 때인 1997년 정무 제1 장관을 역임했다.

고인은 2000년 16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이후에는 명실공히 친박(친 박근혜)계 좌장으로 자리매김했다. 지난 2007년과 2012년 잇따라 '박근혜 경선캠프'의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의 선봉에 섰다.

2012년 9월에는 불법 정치자금 수수 의혹으로 새누리당을 전격 탈당하기도 하면서 사실상 정계 은퇴 수순을 밟기도 했다. 당시 정치권에서는 박근혜 대선 캠프의 '투톱' 격이었던 미래통합당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과의 내부 갈등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고인은 앞서 2004년 한나라당 원내총무로서 당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주도했고, 이후 이른바 '탄핵 역풍'으로 17대 총선에서 낙선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18대 총선에서는 친박연대 후보로 나서서 당선됐으나 19대 총선에서는 서울 종로에 도전했다가 당시 민주당 후보였던 정세균 국무총리에 패했다.이후 KT 고문과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대표상임의장을 역임했다.

홍사덕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다. 발인은 오는 20일로 예정하고 있다.유족으로는 배우자 임경미 여사와 1남 2녀가 있다.

반응형
그리드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