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장현 프로필
가수 장현 나이 고향 사망 이유 사유 원인 여동생 가수 장덕 오빠 가족관계
출생: 1956년 2월 21일, 서울특별시 중구
사망 날짜/장소: 1990년 8월 16일, 성남시
가족: 아빠 장규상, 엄마 이숙희, 동생 장덕
형제자매: 장덕
앨범: 너나 좋아해 나너 좋아해
장현 장덕 사망 이유 원인 날짜
장현(영어: Jang hyeon 또는 hyeon Jang, 1956년 2월 21일 ~ 1990년 8월 16일)은 대한민국의 가수이다. 가수 장덕의 오빠이며, 1980년대 현이와 덕이를 결성하여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90년 2월 4일 동생 장덕은 불면증과 우울증으로 인한 약물 과다복용으로 숨졌으며, 같은 해 8월 장현도 설암으로 건강이 악화되자 사망하였다.
장현 장덕 어머니 엄마 아버지 아빠 직업 장덕 장현 가족 관계
1955년생으로 알려지기도 했으나 실제로는 1956년 2월 21일(음력 1월 10일)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첼리스트였고 어머니는 화가였다.1 1961년 4월 21일 동생 장덕이 태어났고 이후 동생과 함께 미8군부대에서 먼저 데뷔한 후 1976년 현이와 덕이라는 이름으로 한국가요계에 데뷔하였다. 장현은 1976년 <젊음의 도시> 등 영화에도 출현하였으며, 1978년에는 MBC 서울국제가요제에서 입상하였다. (<더욱 큰 사랑> 가수 : 장현 / 작사,작곡 : 장덕)
장현 학력
1962년 8월 서울충무초등학교(前) → 1963년 2월 싱가포르 빅토리아 스쿨 초등부(前) → 1963년 8월 캐나다 온타리오주 오타와 코퍼스 크리스티 스쿨 초등부(前) → 1964년 2월 미국 텍사스주 멤피스 로잰 컬리지에이트 스쿨 초등부(前) → 1964년 8월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새너제이 맨저니타 홀 스쿨 초등부(前) → 1965년 2월 미국 캘리포니아 주 카멀바이더시 올 세인츠 데이 스쿨 초등부(前) → 1968년 2월 서울흥인초등학교 졸업
1971년 2월 서울사대부중 졸업
1974년 2월 경기도 안양영화예술고등학교 졸업
장현은 동생 장덕과 함께 현이와 덕이를 결성하여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75년 장현은 동생 장덕과 함께 미8군부대에서 '드래곤 랫츠(Dragon Rats)'라는 이름으로 데뷔하였으며, 이듬해 1976년 현이와 덕이로 재결성하여 한국가요계 데뷔하였다. 특히 동생 장덕은 작사,작곡,편곡,프로듀싱을 했을 만큼 음악계에서 능력을 인정 받았다. 1977년 동생 장덕은 진미령이 부른 <소녀와 가로등>의 작사, 작곡가 자격으로 제1회 <MBC 서울 국제가요제>에서 최연소로 입상하였으며, 이후 4년 연속 이대회에서 작사/작곡가로 입상하게 된다. 2 이들은 <젊은 도시> <우리들의 고교시대>, <내마음 나도몰라>, <선생님 안녕>, <꿈초롱 둘이서> 등 10여편 영화에 주연 또는 조연으로 출연하였다.2 이후 현이와덕이는 1978년 그들의 첫 레코드 모음집인 <순진한 아이> <꼬마인형> <소녀와 가로등> <일기장> <작은소녀의 사랑이야기> <너는> 등이 수록된 정규1집을 취입, 출반했다.2
한때 장현은 '현이와 거룩한 성' 등의 타 그룹 또는 솔로로 전환했으나, 1985년 재결합하여 <너나 좋아해 나너 좋아해> <이젠 안녕> <잠깐> <뒤늦은 후회> 등이 수록 된 정규2집을 발표한다. 그러나 얼마 뒤 다시 해체하였고,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싱어송라이터였던 동생 장덕은 1986년 4집 솔로앨범 타이틀곡 '님 떠난 후' 가 가요톱텐 5주 연속 1위를 하여 골든컵을 수상(1987) 하였으며, 자신이 작곡한 이은하의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 마저 크게 히트 하였다. 또한 ABU 가요제에서 한국대표가 되는 등 1987년 가장 성공한 여자스타 대열에 합류하였다. 그리고 장현은 코아기획을 설립하여 회사 대표이사로 일하게 된다.
장현 암 투병과 사망
1980년대 말 장현은 설암 말기로 인해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다. 이에 동생 장덕은 오빠 장현의 병간호에 들어가 연예인 활동을 잠정 중단한다. 그와중에 평소에 앓아 오던 불면증과 정신병과 우울증이 겹치면서 약물을 과다복용을 하게 되는데, 결국 1990년 2월 4일 서울특별시 마포구 염리동 자택에서 30살의 나이로 별세를 했고, 장현 또한 "혀의 일부분을 자른다면 회생 가능성이 있다."라는 진단을 거부하여 결국 병이 악화되어 같은 해 8월 16일 세상을 떠났다(향년 34세).
장현 노래 레코드 음반 앨범
더욱 큰 사랑 - '78 MBC 국제가요제 입상
1978년 현이와 덕이 정규 1집4
1985년 현이와 덕이 정규 2집5
1987년 장현 만날수 없는 사랑 정규 1집.6
가수 장덕 프로필
장덕 나이 고향 사망 이유 원인 오빠 가수 장현 여동생 가족관계
출생: 1961년 4월 21일, 서울특별시 중구
사망 날짜/장소: 1990년 2월 4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족: 아빠 장규상, 엄마 이숙희, 오빠 장현
앨범: 님 떠난 후, 예정된 시간을 위해, 너나 좋아해 나너 좋아해, 얘얘
형제자매: 장현
장덕(張德, 영어: Jang Deok 또는 Deok Jang, 1961년 4월 21일 ~ 1990년 2월 4일)은 대한민국의 여성 싱어송라이터이다. 장덕은 싱어송라이터로서 진미령 · 이은하 · 양하영 · 임병수 · 김범룡 · 국보자매 등 많은 다른 가수들의 음반에 참여하며 작사가 · 작곡가로 활동하였고, 음반 프로듀서로도 활동을 하였다. 장덕은 친오빠 장현과 함께 현이와 덕이를 결성하고, 만 14세의 최연소 싱어송라이터로 가요계에 데뷔하여 화제를 모은 바 있으며, 만 15세(고등학교 1학년) 때 서울국제가요제에서 최연소 작사 · 작곡가로 출전하여 입상하는 등 천재소녀라는 별칭을 얻기도 하였다. 또한 그녀는 예쁘장한 외모로써 배우로도 활동, 10여 편의 영화에 주연 또는 조연으로 출연하며 하이틴 스타로도 거듭났다. 그리고 솔로로 독립해 성인이 된 후에도 더욱 많은 연예 활동을 하여 스타의 자리를 지켰다.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등록된 장덕 작사 · 작곡의 작품 개수는 총 129개(2015년 6월 기준: 신탁자코드 W0138300)이며, 생전 남긴 창작작품은 록 · 포크 · 리듬 앤 블루스(R&B) · 컨트리 · 댄스 · 펑키 · 트로트 · 발라드 · 융합(복합) 등 다양한 장르의 300여개 정도이다.
장덕 노래 앨범 음반 출연작 영화 드라마 작품활동 필모그래피
컴필레이션 음반
친구야 친구 (1976)
캐럴 음반
디스코 크리스마스 (1978)
정규 음반
순진한 아이 (1978)
너나 좋아해 나너 좋아해 (1985)
참여 음반
푸른교실 · 선생님 안녕 (OST) (1978)
솔로 음반
컴필레이션 음반
첫사랑 (장덕의 고운노래모음 Vol.1) (1979)
순정 (장덕의 고운노래모음 Vol.2) (1980)
그녀의 모든 것 (골든앨범) (1988)
정규 음반
날 찾지 말아요 (1983)
사랑하지 않을래 (1984)
님 떠난 후 (1986)
이런게 아니었는데 (골든앨범 Vol.1) (1987)
얘얘 (골든앨범 Vol.2) (1988)
예정된 시간을 위해 (1989)
참여 음반
'77 서울가요제 (1977)
'78 서울국제가요제 (1978)
고향생각 (하영) (1978)
'79 서울국제가요제 (1979)
꽃띠여자 (김트리오) (1980)
나는 떠나가네 (최병걸) (1981)
수렁에서 건진 내딸 (1984, 영화)
백치미 (국보자매) (1984)
하나에서 또 하나 (이용식) (1985)
무등산 (방미) (1985)
애인 (이경) (1986)
외출 (김형용) (1986)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 (이은하 86) (이은하) (1986)
이 시간이 지나면 (지예) (1986)
만날 수 없는 사랑 (장현) (1986)
이 음악을 들어요 / 슬픈외면 (김영선) (1987)
기다리지 말아요 (mbc 신인가요제 / 예민영) (1988)
마지막 입맞춤 (김범룡) (1988)
무명초 (김지애) (1989)
경험 (안다미)(1989)
고향생각 (훈이) (1989)
크리스마스 이브 (박혜성) (1989)
왜 (마스코트) (1990)
The Mermaid (연석원) (1990)
사랑은 사랑대로 이별은 이별대로 (임병수) (1990)
꽃처럼 나비처럼(하춘하) (1990)
그래서 그런거야 (성희) (1990)
미련(안다미) (1991)
비 그리고 사랑 (강용욱) (1991)
우리 사랑 영원히 (김성필) (1991)
추모 헌정음반
컴필레이션 음반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 (Various Artist) (1990)
불후의 명곡: 전설을 노래하다 - 장덕편 (Various Artist) (2013)
싱글 음반
현이와 덕이 오마주
2015
현이와 덕이 오마주 01 (박승화 & 김희진) - 나의 공주님
2016
현이와 덕이 오마주 02 (김정은) - 어른이 된 후에 사랑은 너무 어려워
현이와 덕이 오마주 03 (박서진) - 날 찾지 말아요
현이와 덕이 오마주 04 (채은옥) -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
현이와 덕이 오마주 05 (장기섭) - 님 떠난 후
2017
현이와 덕이 오마주 06 (양하영) - 예정된 시간을 위해
현이와 덕이 오마주 07 (박서진) - 만날 수 없는 사람
현이와 덕이 오마주 08 (김정은 & 이우람) - 이별인 줄 알았어요
현이와 덕이 오마주 09 (장필순) - 소녀와 가로등
현이와 덕이 오마주 10 (조유마) - 나를 불러줘
현이와 덕이 오마주 11 (박준희) - 너나 좋아해 나너 좋아해
현이와 덕이 오마주 12 (이지연) - 연민
현이와 덕이 오마주 13 (양수경) - 슬픈 약속
출연 작품
영화
내 마음 나도 몰라 (1977)
선생님 안녕 (1977)
우리들의 고교시대 (1978)
TV 드라마
구리반지 (1990)
장덕 학력
서울광희초등학교(前) → 싱가포르 메소디스트 여학교 초등부(前) → 미국 테네시주 멤피스 허치슨 스쿨 초등부(前) → 서울흥인초등학교 졸업
서울사대부중 졸업
경기도 안양영화예술고등학교 연극영화학과 졸업
미국 벨먼트 대학교 음악학과 중퇴
미국 테네시 주립 대학교 작곡과 전퇴
미국 테네시 주립 대학교 실용음악학과 중퇴
오빠 장현은 오라오라에 출연했을 때 부터 알게 된 부산연예협회지부장이자 왕년의 작사가였던 천봉의 딸 천인실과 극도로 가까워지면서 결혼까지 하게 되고 아이까지 갖게 된다. 그리고 장덕은 결혼한 오빠의 집에서 같이 살게 된다. (1978년 현이와덕이 정규1집 <순진한 아이>가 발표 되었다. <순진한 아이>, <꼬마인형>, <일기장>, <소녀와 가로등>, <정말>, <작은소녀의 사랑 이야기> 등 11곡+경음악1곡 수록, 같은 해 <크리스마스 캐롤집> 발표) 1979년 1월 그녀의 어머니는 미군과 결혼하며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된다. 어머니는 장현 · 장덕을 불러 유학을 시키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떠나면서 어머니는 덕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부르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장덕은 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장현은 이미 천인실과 결혼을 하였고 임신 6개월이 지나 곧 아이를 낳게 된다고 실토한다. 어머니는 장현과 천인실의 관계를 예전부터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결혼한 사실에 실망하게 된다.
어머니는 장현이 가수로서 성공하고 부양능력이 생겼을 때 결혼하기를 바라고 있었고 수차 그것을 장현에게 말해 왔었기 때문이다. 6월 제2회 MBC 서울국제가요제에서 박경희가 부른 <사랑이었네>가 가야금상을 수상하며 장덕은 작사/작곡가로서 3년연속 서울국제가요제에서 입상하는 기록을 세운다. 같은 달 장덕은 지구레코드와 계약하며 솔로 데뷔음반 《첫사랑》을 발표한다. 이 음반은 타이틀곡 <첫사랑>을 비롯 <나도 그래>, <웃어봐요> 등 신곡 4곡과 현이와 덕이의 1집 수록곡들을 다시 수록한 컴필레이션 음반이다. 그 해 10월 장덕은 오빠 장현의 집에서 나와 월세방을 구해 혼자 살게 되는데, 이 때 외로움을 이기지 못해 동맥을 끊고 또다시 자살을 기도한다. 이 사건 이후 장덕은 오빠 · 아버지 가족과 함께 한 집에서 살게 된다. 그해 초 미군과 결혼하며 미국으로 이민가 살고 있던 그녀의 친어머니는 이 시기 장덕의 자살 소동을 모르고 있었다.
1980년 5월 제3회 MBC 서울국가요제에서 최병걸의 <사랑은 떠나도>가 입상하며 장덕은 작사/작곡가로서 4년 연속 입상하는 기록을 세운다(이것은 확실하지 않다. 1977년 · 1978년 · 1979년 3년 연속 입상한 사실은 맞지만 서울국제가요제 관련 정보를 찾아봐도 1980년 입상한 기록은 없다. - 1977년은 서울가요제이며 1978년 부터 서울국제가요제가 열렸다. (※ 서울국제가요제는 78~81년까지는 대회 본선을 치르기 전에 국내가수들을 대상으로 본선 출전자를 뽑기 위한 예선을 따로 치렀는데 1980년 국제가요제 국내예선에서 장덕 작사/작곡 최병걸이 노래한 "사랑은 떠나도"는 예선을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본선대회 출전자만 음반에 기록이 남아 있어서 기록을 찾을수 없는 것입니다. 국내예선에는 최병걸을 비롯한 13개팀이 참가해서 3개팀(혜은이, 와일드캣츠, 진미령)이 본선에 진출했습니다. 한편 대회 참가곡 "사랑은 떠나도"는 이듬해인 1981년 최병걸의 개인 독집앨범에 실렸습니다.) 또한 1981년 TBC 동양방송이 주최하던 세계가요제가 언론통폐합으로 KBS 주최로 열리게 되는데 이때 "연안부두"로 유명한 김트리오의 막내 "김선"이 "사랑은 영원히"로 본선에 오르게 된다. 장덕은 작사를, 김트리오의 "김파"는 작곡을 했다.
6월 그녀는 타이틀곡 <순정>을 비롯 <진실한 사랑이라면>, <만날 수 없는 사람> 등 신곡 5곡과 현이와 덕이 정규 1집, 그리고 그녀의 첫 컴필레이션 음반 《첫사랑》의 수록곡들 중 몇 곡을 골라 그대로 수록한 컴필레이션 음반 《순정》을 발표한다. 10월 미군과 결혼하며 미국으로 이민가 살고 있던 그녀의 친어머니는 한국식품점에 갔다가 우연히 1년이 지난 1979년 9월 9일자 선데이서울 주간지를 통해 장덕의 자살 소송 기사를 접하게 되고 충격을 받아 장덕을 간곡히 불렀다. 장덕은 어머니의 부름에 계속해서 응답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새어머니가 장덕을 짝사랑 하던 박정희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과의 선자리를 주선하여 그녀를 그와 결혼시키려 하자 어린 나이에 겁을 먹고 도망치듯 한국을 빠져나와 어머니가 살고 있는 미국 테네시 주의 내쉬빌로 들어가게 된다. 1980년 10월이었다.
내쉬빌은 컨트리 뮤직의 메카로 일컬어지는 곳으로 장덕은 이 곳에서 벨몬트 칼리지 음악과에 입학, 대학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어머니는 오빠 장현 또한 불러서 대학 공부를 시키려 했지만 설득시키지 못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내쉬빌 한인회가 주최하는 송년파티가 있었다. 장덕과 어머니도 참석했는데, 한인회 회장이 찾아와서 한인사회에 딱 하나 있는 밴드가 실력이 부족해서 곤경에 처해있다며 그들을 도와달라고 장덕에게 부탁한다. 그 밴드의 이름은 '리 패밀리'로 실제 형제들이 조직하여 만든 가족밴드였다. 장덕은 처음엔 거절했지만 어머니가 금년만 해 보라고 해서 결국은 승낙한다. 1981년 장덕은 비싼 등록금으로 인해 벨몬트 칼리지 음악과에서 한 학기를 마친 뒤 테네시 주립대학교 실용음악과로 옮기게 되며 그 곳에서 음악의 기초 · 이론 · 감상 · 작곡 · 작곡기법 등을 전문적으로 배우게 된다. 또한 내쉬빌 작곡가 협회에 회원으로 가입도 하고, 한인 기독교 방송 프로그램 한국의 샘터에서 MC로도 활동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장덕은 같은 리 패밀리의 일원이자 자신을 아껴주는 이승언과 결혼을 하겠다고 어머니에게 허락을 구한다. 당시 어머니는 결혼은 '감옥 같은 것' 이라며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고 대학 졸업 후에 결혼하라고 충고했지만 장덕은 미국에 온지 1년만인 1981년 10월 17일, 내쉬빌에서 이승언과 결혼한다. 그리고 리 패밀리의 일원으로서 한인회의 각종 행사에 참여하게 된다. 밴드에서 장덕은 퍼스트 기타와 보컬을 담당하며 음악적 리더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점점 그녀는 서울에서의 화려했던 가수 생활의 추억을 점점 그리워 하기 시작했고 고향에 대한 향수병을 달래기 위해 시작한 전자 포커게임으로 한학기 대학 등록금을 다 날리기도 했다. 미국에 머물던 이 시기 장덕은 미국 가수에게 <여인이여 안녕>이라는 작품을 주어서 취입 시키기도 하였는데, 당시 장덕의 미국 내 창작활동은 미국 일간지 및 테네시언지에 크게 소개되기도 하였다.
1983년 10월 이혼을 하게 된 장덕은 가수 생활의 추억, 그리고 아버지 · 오빠 · 친구에 대한 그리움 등으로 고국에 대한 향수병에 걸려서 어머니에게 말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메모 한장만을 남기고 한국으로 귀국, 한남동에서 자취생활을 시작한다.3 한 달 뒤(11월) 그녀는 어렵게 서라벌레코드와 3년간 1000만원이라는 금액에 전속계약을 맺고(그녀는 오랫동안 공백을 가진 스타였기 때문에 좋은 조건으로는 계약이 쉽지 않았다.) 타이틀곡 <날 찾지 말아요>를 비롯 <안녕히 계세요>, <가을에 만난 소녀>, <철없는 안녕> 등의 곡들이 수록된 정규 1집 《날 찾지 말아요》를 발표한다. 당시 장덕 본인이 방송 출연을 꺼려한 탓에 방송을 가장 많이 탄 가수 부문에서는 순위에 오르지 못했지만 앨범이 발표된 지 6달 만에 타이틀 곡 <날 찾지 말아요>가 PCI(인기가요순위 조사연구소)에서 집계한 '한 달(1984년 5월) 동안 방송을 가장 많이 탄 노래' 부문 3위까지 오른다. 많은 방송활동을 하지 않는 장덕으로서는 좋은 결과였다.
이 사이 장덕은 새 음반을 내는 자매 듀엣 국보자매에게 <백치미>, <사랑하고 있나봐요>를 작사/작곡해 주기도 했다. 국보자매는 현이와 덕이, 그리고 장덕에 의해 각각 발표된 바 있는 <끝없는 마음이야>, <첫사랑>까지 리메이크 하여 1984년 2월에 발매된 자신들의 새 음반에 수록했다. 1984년 10월 장덕은 이미례 감독, 김진아 · 남궁원 주연의 개봉 영화 <수렁에서 건진 내딸>에서 음악감독을 맡았다. 11월에는 타이틀곡 <사랑하지 않을래>를 비롯 <사랑의 꿈>, <사랑과 인생> 등의 곡들이 수록된 정규 2집을 발표한다.
하지만 대중의 반응은 조용한 편이었다. 이에 장덕은 실망한다. 어린 시절 뭣 모르고 음반을 내고 노래를 불렀던 그 때와 한 동안 공백기를 가졌다가 성인이 되어 복귀, 겪게 되는 지금의 연예계는 너무도 달랐던 것이었다. 모든 것을 혼자 해내야 한다는 점 또한 그녀를 힘들게 만들었다. 결국 장덕은 대부분의 시간을 방에 틀어박혀 우울히 보냈고 식음을 전폐하며 세상에서 버려진 아이처럼 혼자만의 세계에서 신음하게 된다. 방송국에서 출연 섭외 전화가 와도 "장덕이 없어요" 한 마디만 던지고 전화를 끊을 정도였다. 동생의 이런 안타까운 소식에 현이와 거룩한 성의 리더이자 보컬로서 활동하고 있던 오빠 장현이 1985년 4월 울산에서 서울로 상경, 장덕에게 현이와 덕이의 재결성을 제안하게 된다.
1985년 6월 장현 · 장덕 남매는 7년만에 재결합, 현이와 덕이를 결성하며 타이틀곡 <너나 좋아해 나너 좋아해>를 비롯 <이젠 안녕>, <그대의 투정>, <해바라기 사랑> 등의 곡들이 수록된 정규 2집 《너나 좋아해 나너 좋아해》를 발표한다. 현이와 덕이의 정규 1집 《순진한 아이》에서는 모든 곡들을 장덕이 작사/작곡했지만 이 앨범에서는 B면 3번 트랙 <그댄 없지만>과 그들의 정규 1집 《순진한 아이》에 실린 버전들의 재편곡 버전인 B면 4번 트랙 <소녀와 가로등>, B면 5번 트랙 <순진한 아이>를 제외하고는 모든 작품을 장현 · 장덕 남매가 함께 만들었다. 앨범의 타이틀곡 <너나 좋아해 나너 좋아해>가 단숨에 가요순위 10위권 내에 들며 인기를 끌었고 장덕의 막힌 숨통을 트게 해주었다. 1986년 5월에는 장덕이 작곡한 곡들 중 가장 훌륭한 곡으로 평가받으며 훗날 수많은 가수들에 의해 리메이크 되는 리듬앤블루스 스타일의 곡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이 동료가수 이은하에 의해 발표된다.
곡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은 이렇다. 당시 <이은하와 호랑이>라는 밴드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던 이은하는 그룹에서 베이스를 연주하던 사람과 사랑에 빠지게 되어 아버지께 결혼 허락을 맡으러 갔다가 아버지가 노발대발 하면서 재떨이를 던지시는 모습을 본 후 너무 놀라 그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이 때 그녀는 너무 마음이 아파서 한편의 시를 썼는데 그것이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모습 처럼>의 가사였다. 이후 그녀는 절친 장덕을 찾아가 "내가 가사 좀 끄적여 보았는데..." 라고 말했고 장덕은 흔쾌히 작곡을 해주었다. 노랫말의 끝부분이 좋으니 노래제목으로 하자고 제안한 것도 장덕이었다.
1986년 6월 오빠 장현과 추구하는 음악세계가 달랐던데다가 솔로로서의 욕심이 생긴 장덕은 더 이상 듀엣 활동을 이어나가지 않고 타이틀곡 <님 떠난 후>를 비롯 <어른이 된 후에 사랑은 너무 어려워>, <사랑해줘요>, <소외> 등이 수록된 솔로 정규 3집 《님 떠난 후》를 발표한다. 포크뮤직에 디스코가 섞인 타이틀곡 <님 떠난 후>는 KBS 가요톱10에서 5주(1987년 2월 18일 ~ 1987년 3월 18일) 연속 1위를 차지, 골든컵을 수상하였고 MBC 라디오 인기가요, KBS 2FM 인기가요 광장, PCI(인기가요순위 조사연구소), 뮤직박스(도서출판), 전국 DJ 연합회 등 각종 인기 순위 차트에서 정상을 차지하게된다. 1986~87년 장덕은 제 2의 전성기를 보내며 가장 성공한 여성스타로 인정받았다.
장덕 사망 이유 원인 날짜 1990년 2월 4일 사망
오빠 장현이 설암으로 쓰러지고 가수활동을 중단하며 오빠의 병간호를 하던 장덕은 점점 수면제 없이는 잠을 이루지 못하며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게 된다. 1990년 1월 20일 장덕은 모처럼 가요 프로그램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에 출연하는데 이것이 장덕이 대중 앞에 선 마지막 모습이었다. 1990년 2월 4일 오전 2시 50분 서울특별시 마포구 염리동 진주아파트 5동 1008호 안방에서 장덕은 다량의 수면제와 기관지 확장제 등 세가지 약을 일시에 복용한 후 이상증세를 보이며 신음 중이었는데, 이것을 의상 담당 문인옥이 발견하고 장덕의 아빠에게 연락, 서대문 고려병원으로 옮겼으나 동시 투여(투약)에 따른 상승작용(相乘作用) 즉, 약물 상호작용에 의한 쇼크로 별세했다. 그녀의 나이는 항년 30살(만28세)이였다.
문인옥의 말에 따르면 장덕은 불면증을 겪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경찰은 장덕이 설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있는 오빠 장현의 병간호를 오래 해왔으며 최근 이은하 · 조영남 · 최진희 · 변진섭 · 김승진 · 하춘화 등 동료 가수들에게 곡 의뢰를 받고 신곡 작업까지 하는 등 빽빽한 일정으로 무리를 해왔다는 주변의 진술에 따라 과로와 감기증세 때문에 과다복용한 약이 부작용을 일으켜 숨진 것으로 판명했다.4 하지만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알려진 그녀의 죽음에 대해 충격과 더불어 자살설까지 나돌며 세간의 관심이 불거졌다. 이후 그녀의 유작 앨범은 자신의 운명을 예언한 것이라는 소문과 함께 호기심을 증폭시켰다. 동생 장덕이 세상을 떠나자 장현은 인터뷰에서 "동생의 죽음이 자신을 대신하는 것 같은 죄책감이 앞선다"고 고백했다. 봉천동 자택에서 거행된 영결식은 가수 이태원의 사회로 남궁옥분 등 50여명의 동료 가수들의 오열 속에 진행되었다.
그 해 6월 장덕 · 장현 남매의 매니저로서 그들이 죽는 날 까지 항상 함께 했던 김철한의 기획하에 전영록, 이선희, 김범룡, 박혜성, 최성수, 진미령, 임종환, 위일청, 지예, 양하영, 임지훈 등 12명의 동료가수들이 참여한 장덕 추모앨범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가 발표된다. 이 음반은 장덕이 생전 발표한 기존 곡들을 리메이크 하고 있는 형태이지만 <일어나> 등 악보로만 남아있던 미발표곡들도 수록되어 있으며 동명 타이틀곡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는 1990년 한해 총결산 가요순위 톱10 안에 들게 된다. 설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던 장현은 7월 중순경 병세가 악화돼 경기도 성남시 성남병원으로 병원으로 옮겨졌고 혼수상태에서 인공호흡으로 연명했지만 8월 16일 오후 4시 20분경 아내와 아들 원을 남겨둔 채 엄마가 보는 앞에서 향년 3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5 남매의 연이은 비극적 죽음을 접한 대중의 충격은 너무나 컸다.
양하영 장덕 장현 마이웨이
양하영이 장덕을 떠올리며 눈물을 쏟았다.10일 방송된 TV조선 '스타다큐 마이웨이'에서는 '갯바위'를 부른 가수 양하영의 모습이 방송 최초로 공개됐다.이날 양하영은 故장현 아들 장원과 함께 고모인 故장덕의 유해가 뿌려진 남이섬을 찾아 함께 그를 그리워 했다.
양하영은 "언젠가 한번 후배와 기린 적도 있고 한데 원이가 꾸준히 했다는 말을 들으니까 마음이 뭉클하고 그렇더라"며 이내 눈물을 쏟았다.
이에 제작진은 "양하영에게 장덕이란 어떤 사람인가"라고 물었고, 양하영은 "초등학교 때무터 장덕을 매체를 통할 때마다 너무 보고 싶었던 친구. 동갑이었기 때문에"라며 "가수가 되서 장덕부터 찾았다. 방송에서 만나 나이가 같다고 친구가 되고 싶다고 해서 단짝 친구가 됐다"고 특별히 애정을 쏟은 친구라고 답했다.
이어 故 장덕과의 추억에 대해 "집에 가서 밥 먹고 같은 의상실, 미용실도 같았다"며 "친구였기 때문에 더 굉장히 돈독한 마음이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양하영은 "아쉬움, 안타까움, 그리움. 같이 지금까지 이어졌더라면 얼마나 더 좋은 곡을 많이 쓰고 많은 것을 공유했을까 아쉬움이 제일 큰 것 같다"고 장덕을 추억했다.
한편 故 장덕은 '뒤늦은 후회', '현의와 덕이' 등이 유튜브 등에서 재조명 받으며 '80년대 아이유'로 불리고 있는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