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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진 나이 가수 와이프 전부인 윤복희 전남편 이혼 결혼 본명 가족 자녀

by 제로스 2023.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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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트 가수 남진 프로필

​남진 나이 학력 고향 혈액형 데뷔 가족관계 종교 본명

남진 나이 출생: 1946년 9월 27일 (73세), 목포시 ​남진 고향 출생지

​남진 본명: 김남진

​남진 부인 아내 와이프 배우자: 강정현 (1980년–), 윤복희 (1977년–1979년)

영화: 가슴 아프게, 가수왕, 국제시장, 수전지대, 형수, 벽 속의 여자

​남진 자녀: 김홍미, 김형국

​남진 ​예명

남진(南珍)

본명

김남진(金南鎭)

출생

1945년3 9월 27일 (74세), 전라남도 목포시

​남진 학력

목포유달중학교

문태고등학교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 학사

​남진 데뷔

1965년 서울 플레이보이

신체

​남진 혈액형 O형

​남진 가족

부친 김문옥, 슬하 1남 3녀

​남진 직업 장르

트로트

​남진 종교

개신교 → 불교 → 개신교(예장합동)

대한민국의 원로가수로 오빠부대의 원조격이라 불릴 정도로 높은 인기를 얻었다. 데뷔 50주년을 넘긴, 70대인 현재도 현역으로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원래 스탠다드 팝과 엘비스 프레슬리의 록큰롤 창법을 선호했고, 선이 굵은 저음의 남자다운 보이스를 가지고 있다.

90년대 두번째 컴백 이후로는 나이도 있고 해서 트로트 곡 위주로만 발표했지만, 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중반까지 최전성기에 트로트와 로커빌리 로큰롤을 오고 가면서 다양한 장르를 소화했다. 또한, 엘비스 프레슬리를 깊게 의식하여 엘비스를 벤치마킹 한 것도 유명하다. 그래서 그가 부르는 트로트는 다른 트로트 가수들에게서 나오는 뽕끼가 없어서 지금 들어도 중후하고 세련된 느낌이 든다.

현재는 가수로서만 기억되지만, 원래 영화배우를 지망한 연극영화과 출신이었고, 전성기에는 수십편의 영화에 출연한 영화배우다. 출연작을 보면 외모로 여느 남자배우과 비교해도 빠지지 않는다.

전라남도 목포에서 목포일보의 발행인이자, 제5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문옥의 늦둥이 장남으로 태어난 남진은, 부유한 환경에서 어린 시절부터 연극 음악에 심취했다.6 목포중학교 재학 때부터 닐 세다카 나 폴 앵카등의 팝송을 즐겨 불렀던 그는 서울로 전학하게 된다. 목포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레스토랑에서 팝송을 불러 밴드마스터에게 가수 제의를 받게된다. 당시 아버지는 반대했지만, 대학도 연극영화과를 진학해 영화배우로서의 꿈을 꾸었다. 남진의 집안이 목포에서 상당히 부유한 집안이였는데, 경찰관들이 자전거를 타고 순찰을 돌던 시절에 일본산 오토바이를 타고 학교에 등하교를 했다고 한다.

앞서 레스토랑의 밴드 마스터로부터 당시 최고 인기가수 남일해의 곡을 만들었던 작곡가 한동훈을 소개 받고, 그로부터 자신의 음악학원에 등록하고 연습생 생활을 할것을 제의 받는다. 영화배우의 길을 꿈꿨던 그 였지만, 당시 순전히 학원에 있던 여학생이 이뻐서 등록을 하고 연습생겸 연애 생활을 시작한다. 불과 몇개월 후인 1965년 드디어 첫 음반을 레코딩 하게 된다. 데뷔곡은 한동훈이 작곡한 ‘서울 푸레이보이’라는 스탠다드 팝을 연상시키는 곡이었지만, 철저하게 폭망하고 실망한 그는 낙향했다.

다시 작곡가 한동훈이 당시 오아시스레코드사의 전속가수 제안을 하고, 두번째 음반을 발표했으며, 첫번째 음반과 달리 방송에도 제법타고 히트 바로직전 까지 갔지만, 당시 노래 제목이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국가에 의해 금지곡 처분이 되었다. 금지곡이 된 타이틀 곡명은 '연애 0번지'.

 

 

두번째 음반도 실패를 하자, 그는 다시 고향 목포로 낙향하여 술로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그렇게 지내던 중 그의 어머니가 두번째 앨범에 담긴 다른 곡인 '울려고 내가 왔나'라는 트로트 곡을 밀면서 이 곡으로 다시 도전할것을 권유했다. 이 곡은 2집 레코딩 중 작곡가인 김영광이 남진에게 부르게 했으나, 남진이 트로트 부르기가 창피 하다는 이유로 거절했던 곡이었다. 이에 김영광이 그래도 노래가 아까우니 내가 불러서 곁다리로 음반 맨 끝에 넣겠다 라고 했으나, 그가 사정이 생겨 녹음 시간에 오지 못하게 됐다. 어쩔수 없이 곡 수는 채워야 했기에 남진은 내키지는 않지만, 녹음해서 앨범 맨 끝에 집어 넣었는데, 이 곡이 그야말로 대 히트를 치면서 남진이란 이름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게 된다.

트로트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일단 트로트 곡으로 이름을 알린 그는 이듬해인 1966년 박춘석이 작곡한 '가슴아프게' 가 최고의 인기를 누리면서, 그 해 MBC 신인가수상을 수상했다. 이때부터 남진은 영화배우로도 대활약 하게 되며, 가요계와 영화계를 넘나드는 빅스타의 자리에 올랐다.

그 후에 나온 로커빌리 스타일의 불멸의 히트곡인 '마음이 고와야지' 는 그를 단순히 트로트 가수로만 국한 시키지 않고, 가요계의 독보적인 캐릭터로 인정 받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잘생긴 얼굴, 그리고 엘비스 프레슬리를 모방한 창법과 무대 액션에 당시의 소녀 팬들은 열광하기 시작했고, 이 는 그 후 '그대여 변치 마오', '님과함께' 같은 대표곡으로 이어졌다.

한창 인기를 누리고 있던 때인 1969년에 해병대에 입대했고, 이후 베트남전에도 파병되었다. 남진이 무릎팍도사에서 말한 바에 따르면, 원래 1년간 파병가기로 되어 있었지만, 귀국하여 베트남에서 동료들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는 것은 대한남아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여단장에게 부탁해서 2년간 파병생활을 하게 됐다고 한다. 수많은 동료들의 전사를 겪으면서 사람은 죽으면 다 똑같다라는 사실이 와 닿았다고 한다. 언론에 나온 월남전에 파병된 남진의 모습을 담은 사진은 파병초기에 촬영된 것이라고 한다. 베트남의 날씨가 너무 더워서 나중에는 군복을 제대로 입을 수 없었다고 한다. 남진의 인터뷰에 따르면, 베트남에서 몇 차례 죽음의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고 한다.

근데 남진이 월남전에 파병된 실제 이유는, 해병대 입대 후 군무를 완전히 이탈하여 자기 집에 돌아가 평소처럼 집에서 지내며, 연예활동을 계속 하는 등 어처구니 없을 정도의 군복무위반 비리를 저지르다가 군 수사당국에게 들통나서 그 벌로 베트남에 강제로 보내진 거였다고 당시엔 보도됐었다. 남진 외에도 진송남, 박일남 등 당시 해병대 소속이던 10여명의 연예인들이 해병대 간부들의 비호 아래 모두 그런 혜택을 봤던 조직적인 비리였다. 44년뒤에 비슷한 일이 발생한다 베트남에서도 실은 전투병이 아니라 오늘날의 용어로 치면 연예병사로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저 사건에서 해병대 복무 중에도 집에서 지내고 왔다갔다 하며 자유롭게 연예활동을 한 것은 남진 등 해당 연예인들이 군율을 어기는 잘못을 한게 아니라 해병대측의 약속과 비호에 따른 행위였을 뿐이었다8. 애초에 해병대가 군복무 중에도 계속 연예계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해 주는걸 약속하고, 그 조건으로 스타들의 "해병대 연예대" 입단을 추진하여 해병대 연예부대의 구성원을 유명스타들로 빵빵하게 채운 것이었다. 즉, 유명 연예인들을 해병대로 데리고 오기 위해 파격적인 조건과 대우를 걸고 스카웃한 것이었다. 근데 모 신문사 회장이 자기 딸의 생일파티에 당시 해병대 일병이던 남진을 포함한 연예병사 5명을 초청했지만, 군인 신분에 사적인 초대이기에 거절했고, 이에 신문기사를 통해 군복무 중에도 사회에서 연예계 활동을 계속 해왔던 것을 폭로하는 보복성 기사를 보도한 것이었다고 박일남이 티비쇼에서 밝혔다. 해병대측이 당초 약속하여 보장한 바에 따른 연예인 활동이었을 뿐이었다는 원인 내용은 쑥 빼버리고 자유로운 사적생활과 연예계 활동을 했다는 결과만 폭로한 보도가 나가서 남진 등의 연예인과 해병대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자, 이를 무마시키기 위해 해병대 고위간부들이 국내 연예활동을 보장했던 당초의 약속을 뒤집고 베트남으로 파병시켜버린 것이었다.

최고의 순간에 군대행을 택하고, 9해병대의 모습으로 월남전까지 갔다 온 그는 묘하게도 그가 벤치마킹한 엘비스 프레슬리의 행보와도 매우 닮아 있었다. 엘비스는 1950년대 후반 로큰롤 음악이 기성 사회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고 몰락 위기에 빠지자, 군대에 자원 입대하여10 이미지 쇄신을 노린 바 있다. 그 이후 G.I. Blues라는 곡과 동명의 영화를 발표하면서 "성실한 미국인 젊은이"의 이미지로 거듭났다. 남진 역시 엘비스의 G.I. Blues를 한국어로 번안하여 불렀다. 그리고 1973년 하와이 공연때 엘비스가 입었던 점프수트를 매니저가 직접 미국까지 가서 엘비스 프레슬리의 매니저를 직접 만나서 구해온 것도 유명하다

71년 군 제대후 국내에 돌아와 보니, 자신의 영혼의 파트너 박춘석이 라이벌 나훈아와 손을 잡고 '물레방아 도는데' 등의 히트곡을 쏟아내는 중이라 이쪽과의 협력은 접고 다른 파트너(남국인)를 찾아 곡을 받고 다시 정상의 반열에 서게 되는데, 그 노래가 바로 남진의 최고 히트곡 중 하나인 "님과 함께"였다. 제대 후에 더욱 폭발적인 사랑을 받게 된 그는 국내 가수 최초로 서울 시민회관에서 귀국 기념 공연을 열었고, 컴백 4개월만에 TBC 남자가수상과 MBC 최고 가수상에 오른다.

언론은 그의 컴백과 더불어 당시 촉망받는 신인인 나훈아와의 라이벌 구도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초기 3년간은 남진이 내리 3연속 가수상을 타며 나훈아를 완전히 압도했다.

이후 1972년 '나훈아 피습사건'이라는 큰 사건이 터졌다. 이때 나훈아 피습사건의 범인으로 낙인이 찍혔고, 루머가 당시엔 급속도로 퍼졌다.

이후 라디오 스타 622회에서 밝혔지만, 이어 남진은 "몇십 년 지나서 안 사실이다. 故신성일 선배한테 그 괴한이 제일 먼저 갔더라. 그 다음으로 저한테 왔다. 아침에 인기척에 눈을 떴는데 머리맡에 모르는 얼굴이 있었다"면서 괴한이 돈을 달라고 요구했다고 말했다. 남진은 이를 거부했다면서 "(괴한이) 당신 라이벌을 해치면 돈을 줄 거냐고 말을 하더라. 정상이 아니구나 싶었다"고 덧붙여 좌중을 경악케 했다.

이어 남진은 "그러고 나서 몇 일 있다가 사고가 난 거다. 나중에 저희 목포 집에 와서 방화도 하고 그랬다. 어머니가 계신 집이었다. 지금도 마음이 아픈 게, 저희 할아버지, 할머니 초상화가 탄 게 지금도 성질이 난다"고 고백해 놀라움과 안타까움을 안겼다.

​남진 결혼 첫번째 전부인 아내 직업 가수 윤복희 이혼

1976년에 윤복희와 결혼하여 화제를 끌었지만, 1979년 법적 이혼을 하고 1980년대 신군부의 등장으로 조직적으로 탄압받으며, 미국으로 가게 된다. 조용필 등 후진들이 치고 올라온 탓도 있다... 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거는 한참 나중 일이고, 김대중과 친분이 있는 집안 자손이라는 이유로 아예 방송 출연을 금지시킨 탓이 훨씬 크다. 김대중이 학생 때 남진 아버지가 운영하던 목포일보에서 사장상을 받았고, 그 외에도 남진 아버지 덕을 많이 봤다고 한다. 목포에 내려가면 항상 남진 아버지 집에 묵었다고. 1990년대에 국내로 다시 복귀했다.

남진 결혼 두번째 부인 아내 강정현 재혼

1980년 남진 부인 아내 배우자 와이프 강정현 과 결혼식을 올린다.남진 자녀 자식 아이 아기 딸 아들 슬하 1남 3녀 를 슬하에 두고 있다.(남진 가족 관계)

1980년대 이후 태어난 세대에겐 가수만로 알려져서인지 오랜만에 영화 대한민국 헌법 제1조에 집창촌 부근 성당의 욕쟁이 주임신부 역할로 출연하자 "남진이 영화에도 나온다"는 얘기가 돌았는데, 이미 전성기이던 1970년대에 히트곡의 이름을 딴 님과 함께 등 수십 편의 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어서 가수 겸 배우라고 해도 문제가 없다. 물론 잘 생긴 얼굴과 큰 인기 덕에 영화에도 나온 거고 배우로서는 연기가 좋다고 할 수 없어 별다른 성과가 없긴 하였지만. 나훈아도 인기빨(..)로 연기를 몇번 한 적 있는데, 이 두 사람은 '어머님 생전에(1973년)'같은 영화에 나란히 출연하기도 했다.

1989년에 조폭에게 칼로 허벅지를 찔리는 큰 부상을 입었으며, 지금도 한쪽 다리가 불편하다고 한다.## 허벅지에는 큰 동맥이 지나가는 곳이라, 조금만 옆으로 맞았으면 그 자리에서 사망할 수도 있었다고. 그래도 여전히 허리는 튼튼하다

21세기에도 방송에서 다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2000년에 낸 "둥지"가 대표적. "신비주의" 컨셉의 나훈아와 대비된다. 2008년 이후 나훈아가 모종의 섹시코만도 바지 사건 이후 활동을 중단하면서 최근 더욱 두드러진다. 본업인 가수로서 각 지방 공연은 2018년 현재에도 쉬지 않고 꾸준히 하고 있으며, 곧잘 매진이 되고 있다.

2011년 9월 12일, 추석 특집 프로그램 나는 트로트 가수다에서 문주란이 '남진'의 '나야 나'를 불러 1위를 차지했다.

남진은 과거 방송된 MBC '황금어장'의 '무릎팍도사'에 출연했다.

이날 MC 강호동이 "톱스타 자리에서 해병대에 자원 입대, 베트남전까지 참전한 것은 인기를 더 얻기 위해 벌인 행동 아니냐?" 질문에 남진은 "베트남전은 당시 해병대라면 한 번씩 다 가는 거였다. 그러다 보니 나 역시 묻혀서 가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MC들은 남진의 이 같은 대답이 예상외라는 듯 놀라는 표정이었다. 이에 "그럼 파병이 될 줄 모르고 입대한 것이냐"는 질문이 뒤를 이었다.

남진은 "그렇다. 다들 가는 거라 가긴 갔는데 솔직히 두려웠다. 밤에 매복을 나가면 영화촬영을 온 건지, 실제상황인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였다"고 당시 심경을 고백했다.

또한 남진은 인기스타라는 점이 작용해 남들보다 군생활의 시작이 힘들었음을 토로했다. 기합을 준다고 고참들로부터 방망이 30대를 얻어맞은 사연을 밝힌 것.

남진은 "당시 얼차려로 방망이 30대를 맞아봤다. 아마도 내가 연예인이니 먼저 가있던 선임들의 곱지 않은 시선도 존재했다. 그래서 많이 맞았다. 그대로 난 엉덩이에 살이 많아서 잘 참았다. 하지만 같이 갔던 동료 가수는 때릴려고 시늉만 해도 저 멀리 기겁하며, 도망가버렸다. 그 사람 때릴려면 한 시간이나 걸렸다. 결국 그 모습에 웃다가 더 맞기도 했다"며 과거 기억을 떠올렸다.

당시 남진이 복무하던 부대는 육로 이동은 불가능했고, 오직 헬기로만 왕래가 가능했다고.

남진은 박스 채 날아오는 팬레터를 고참들이 빼앗아 간 이야기, 본인의 고참과 팬이 펜팔을 통해 결혼까지 골인한 사연 등 관련한 재미난 일화를 소개해 눈길을 끌었다.

남진은 1945년생으로 올해 나이 76세이다. 그는 1965년 서울플레이보이로 데뷔해 '님과 함께', '가슴 아프게', '미워도 다시한번', '빈잔', '둥지' 등 다수의 히트곡을 보유하고 있다.

남진 나이는 27일 방송된 ‘가요무대’에 그가 출연하면서 화두로 오르내리고 있다. 남진 나이는 올해 75세인 것으로 알려졌다. 남진은 이날 ‘어머님’을 열창, 관중석의 뜨거운 호응을 이끌어냈다.

데뷔 50주년을 넘긴 그는 70살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역으로 꾸준히 활동 중이다. 남진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록큰롤 창법을 선호, 선이 굵은 저음의 남자다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앞서 남진은 윤복희와 1975년 동거를 시작, 1977년 결혼에 골인했다. 하지만 3년 7개월 만에 이혼하면서 각자의 길을 걷게 됐다. 윤복희는 과거 ‘무릎팍도사’에 출연해 남진과의 결혼은 전 남편 유주용에게 복수하기 위한 반발심이었다고 털어놓기도 해 세간의 화제를 다시 한 번 모으기도 했다.

대부 남진은 대선배답게 첫 타자로 나서 ‘둥지’ 족집게 강의를 펼쳤다. 남진은 노래의 포인트를 짚어주는 동시에 ‘둥지’의 곡 탄생에 얽힌 비하인드 러브 스토리를 공개해 모두의 궁금증을 자아냈다.

트레이드마크 고관절 댄스까지 직접 선보이며 열혈 강의를 펼치던 남진은 뜻밖의 실수로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또한, 데뷔 22년차 가수지만 안타깝게도 빛을 보지 못한 붐은 이날 남진의 수제자를 자처했다. 남진의 강의를 한 번 듣자 순식간에 붐이 명가수로 거듭나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

성공적인 두 번째 공연이 막바지에 달하는 순간 '트로트 황제' 남진이 깜짝 등장하며 모두를 놀라게했다.

남진은 등장만으로도 무대를 압도하며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전혀 예상치 못한 남진의 등장에 트롯신들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어서 설운도, 김연자, 주현미, 진성, 장윤정 트롯신 5인방도 남진과 함께 한 무대에 출격해 트로트계 역사에 남을 역대급 최강 라인업을 완성했다.

남진은 1946년생으로 올해 75세다. 전라남도 목포 출생인 그는 뛰어난 재능을 바탕으로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진학했다.

1965년 1집 앨범 '서울 플레이보이'로 데뷔한 그는 이듬해인 1966년 박춘석 작곡가의 곡 '가슴아프게'가 히트하며 MBC 신인가수상을 수상했다.

남진 특유의 굵고 시원한 목소리와 잘생긴 외모, 앨비스 프레슬리를 닮은 스타일이 소녀팬의 폭발적 지지를 불러오며 당대 최고의 스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후 '마음이 고와야지', '님과함께', '둥지' , '빈잔', '나야나' 등의 곡이 꾸준히 히트하며 '트로트의 황제'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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