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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미 나이 가수 전남편 직업 이혼 작곡가 이봉조 결혼 노전숙 가족 자녀 고향

by 제로스 2023.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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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배우 트로트 가수 현미 프로필

현미 나이 학력 고향 본명 가족관계 혈액형 종교 데뷔 소속사

본명

김명선 (金明善)

출생

1938년 1월 28일 (84세)

평안남도 강동군 고천면 맥전리

국적

대한민국

학력

덕성여자대학교 (가정학과 / 명예학사)

혈액형

O형

가족

자녀

슬하 2남 고니

이영곤(첫째아들)

이영준(둘째아들)

둘째 며느리 원준희

조카 노사연, 한상진

종교

개신교(그리스도의 교회)

데뷔

1957년 미 8군 번안곡 O Danny Boy

출생: 1938년 1월 28일 (84세), 북한 평양 직할시

본명: 김명선

형제자매: 김화선, 김명옥, 김명희, 김명자, 김길자

가족

자녀

원준희(둘째며느리)

한상진(조카)

박정은(조카며느리)

노사봉(조카딸)

노사연(조카딸)

이무송(조카사위)

아일리(조카딸)

출생

1938. 평안남도 평양

가족

아들 고니, 아들 이영준

학력

덕성여자대학교 학사 명예졸업

데뷔

1962년 노래 '밤안개'

수상

1999년 제6회 대한민국연예예술상 특별공로상

1997년 제11회 예총예술문화상 대상

경력

2012.03 한국자유총연맹 홍보대사

작품

곡, 공연, 앨범, 방송, 도서, 영화

본명 김명선

金明善

출생 1938년 1월 28일(84세)

평안남도 평양시

국적 대한민국

거주지 서울특별시

직업 가수

활동 시기 1962년 ~ 현재

종교 개신교(장로회)

소속사 없음

현미 직업 영화 배우 원로 트로트 가수.현미 나이 1938년 1월 28일 (84세).현미 고향 출생지 평안남도 강동군 고천면 맥전리.

가수 현미 사망 죽음 이유 사유 원인 사인

트로트 가수 현미 사망 나이 2023년 4월 4일 (향년 85세)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촌동 2023년 4월 4일, 향년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경찰에 따르면 이날 오전 9시 37분경 서울 용산구 이촌동 본인의 자택에 현미가 쓰러져 있는 것을 팬클럽 회장 김모 씨가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고,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망 판정을 받았다. 시신은 중앙대학교병원 장례식장으로 옮겼다. 촬영차 미국에 있던 조카 한상진은 인터뷰에서 "이모가 어제까지 정정하셨다고 한다. 건강하게 지방 공연도 다녀오셨는데 갑자기 쓰러져 돌아가셨다. 가족도 없이 혼자 사시는 이모가 그렇게 쓰러져, 병원 치료도 받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니 마음이 너무 아프다."라고 밝혔다.현미 사인에 대해 지인은 현미가"지난해에 베란다에서 꽃 화분을 만들다 넘어져 발목이 부러졌다. 한 번 다친 부분이 약해져서 아마 그게 문제가 되지 않았을까 라며발목 골절"을 언급하기도 했다.

현미 가족 사진

현미 경력 이력 홍보대사

2012년 〈대한적십자사 서울지사 홍보대사〉

2010년 〈현미먹기운동 홍보대사〉

가수 현미 노래 앨범 음반 대표곡 히트곡

1962년 〈밤안개〉

1963년 〈보고 싶은 얼굴〉

1964년 〈떠날 때는 말 없이〉

1966년 〈무작정 좋았어요〉

1967년 〈몽땅 내 사랑〉

1962년 밤안개

1962년 내 사랑아

1963년 보고 싶은 얼굴

1964년 떠날 때는 말없이

1966년 무작정 좋았어요

1966년 애인

1967년 몽땅 내 사랑

1968년 바람

1971년 별

1991년 왜 사느냐고 묻거든

2001년 아내

2017년 내 걱정은 하지마

현미 방송 예능 출연작 작품활동 필모그래피

2018년 《TV는 사랑을 싣고》

2013년 《슈퍼스타K 5》

2010년 《슈퍼스타K 2》

2009년 《놀라운 대회 스타킹》

현미 전남편 이봉조 사진

현미 데뷔

1957년 미 8군 번안곡 O Danny Boy 1957년 미8군 무용수로 처음 활동하였고 1962년 정식 가수로 데뷔하였다.

영화 배우 현미

1966년 영화 《워커힐에서 만납시다》의 단역으로 영화배우로 데뷔하였다.

현미 어린시절 학창시절

현미 과거 1938년 1월 28일에 일제강점기 평양에서 8남매 중 셋째로 출생하였다.1963년에는 〈보고싶은 얼굴〉이라는 곡을 불러 이산가족 상봉이 한창이던 당시 그들의 아픔을 노래로 달래주기도 했다. 1960년대에는 패티 김, 이미자 등과 함께 대한민국의 대표 여성 가수로서 인지도를 넓혀갔다.

현미 월남 이유 사유 원인

출생지였던 현미 북한 평양에서 살았으나 한국전쟁이 한창 전개되던 1951년에 1.4 후퇴를 계기로 월남하게 되었다.월남 후, 1957년 미 8군 무대에 칼춤 무용수였던 현미는 펑크가 난 가수의 대타로 무대에 오르면서 가수의 길을 걷게 됐다. 1958년 미8군 SHOW 무대에 출연하면서 명성을 얻으며 1962년에 이봉조가 개사/편곡한 〈밤안개〉라는 곡으로 가요에 정식 데뷔하였다(원곡은 Nat King Cole의 It's A Lonesome Old Town). 이 곡을 통해 대중들에게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현미 이산 가족

현미 가족은 8남매 중 셋째로 1.4 후퇴 때 부모, 6남매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왔다. 당시 평양의 집이 망가져 조부모댁에 두 여동생이 맡겨졌고 1.4 후퇴 당시 피난하지 못하고 북에 남았다. 휴전 직후 두 여동생은 조부모 슬하에서 컸다. 2000년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진행될 때 친오빠와 동행해서 중국 연변에서 한번 만났는데, 그 여동생들의 모습은 아주 불쌍했다.

현미 가수가 된 계기 사연 이유 사유 원인

현미는 1957년 미8군 위문 공연 무대 칼춤 무용수였던 현미는 방송을 펑크낸 여가수 대신 무대에 오르면서 가수의 길을 걷게 됐다. 1957년 미8군 SHOW 무대에서도 활동하였다. 당시는 드물게 있었던 여대생 가수라는 메리트를 살려 현 시스터즈라는 그룹으로 활동했고 그 중에서도 센터를 담당했다. 그 때 현미를 눈여겨봤던 작곡가 이봉조는 현미에게 '아, 목동아'라는 팝송 번안곡으로 음반을 만들어줬고 현미는 그때부터 본격적인 가수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사실상 데뷔곡인 셈. 당시 곡을 녹음하던 현미의 성량이 너무 커 다른 가수들과는 다르게 몇 발자국 떨어져서 곡을 녹음했다는 일화는 꽤 유명하다.

이봉조 현미 노래

1962년 이봉조와 1집을 작업하며 미국의 대가수 냇 킹 콜의 곡에 현미 본인이 직접 작사한 가사를 입혀 '밤안개'를 발표, 단번에 스타덤에 오른다. 사실 본래 '밤안개'가 타이틀곡이 아니었으나 '밤안개'가 타이틀 곡이었던 '당신의 행복을 빌겠어요'보다 인기가 많아지자 뒤늦게 교체하여 재발매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또한 작곡가 길옥윤의 데뷔곡으로 유명한 '내 사랑아'가 수록 되었다. 이후 60년대 대표적인 여가수로 자리매김하며 당대 최고의 가수였던 한명숙과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기도 했다.미군 무대 데뷔이래 60년대 연달아 재즈 팝을 불렀던 현미는 1968년 이봉조 작곡집 바람을 부르며 또다시 히트작을 내놓는다.

 

현미 집안

노사봉, 노사연, 배우 한상진의 이모이다. 1980년대 후반에 '사랑은 유리같은 것'으로 유명한 인기 가수였던 원준희는 현미의 둘째 며느리 이다.

현미 친구 친분 인맥 인간관계

엄앵란 현미

현미 엄앵란 60년 지기 절친한 사이다.

길옥윤 이봉조 현미

작곡가 길옥윤의 작곡 데뷔곡도 사실상 현미 1집에서 이뤄졌다. 길옥윤이 작곡한 곡을 이봉조가 건내받아 현미 1집에 수록했는데 그 곡이 '내 사랑아'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길옥윤 이별 콘서트에 현미가 첫 무대를 장식했다.

재즈풍의 보컬을 통해 한국형 팝을 선도했던 현미는 1957년부터 현시스터즈로 데뷔한 뒤 1962년 <밤안개>가 수록된 1집 앨범으로 많은 인기를 얻었다. 주로 이봉조의 곡을 불렀으며 최희준, 한명숙, 이금희, 남일해, 박재란, 위키리, 유주용 등과 함께 60년대 톱가수로 활동, 대한민국의 양대 디바인 이미자, 패티 김과 어깨를 나란히 한 대가수이다.

현미 성격

현미 성격 젊었던 전성기 시절 부드러운 측면이 많고 정이 많아서 본인이 잘 나갈때도 후배들에게 따뜻한 선배이자, 이야기도 잘 들어주고 도움도 잘 주는 선배였다고 한다. 중년 이후에도 젊은 후배들이 어려워하지 않고 교류하는데 무리가 없었고, 노년이 된 후에도 어머니같은 선배로 중견 가수나 연예인 후배들에게 인식되었다. 그런 성향을 이용한 사람들이 작용한 측면이 많았던지 21세기에 사기당한 이야기 뿐만 아니라 80~90년대에도 지인들을 도와주다가 돈을 못 돌려받는 등 금전피해를 당한 적이 많아서, 당시 아침 방송이나 토크쇼 계열 방송에 나와 그런 이야기들을 한 적이 많이 있었다.

현미 홍보대사 현미 쌀

예명 때문에 현미 홍보대사가 되기도 했다. 현미가 출연한 어느 방송 중 쌀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왔는데, 도중에 현미에 관련한 이야기가 나오자 자신이 데뷔할 때는 현미라는 쌀이 없었다고 한다. 이후에 현미라는 쌀이 나와서 자신도 놀라면서도 웃겼다고 한다.

현미 건강

현미 나이가 들어가면서 뼈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라고 한다.침대에서 떨어져 수술을 받고 회복중이라고 한다.

현미 노래 교실 강사 사업 ceo 사장

70년대 후반부터는 가수 생활이 뜸해지기 시작했고, 이 시기에는 이봉조와의 별거로 생활비를 위해서 국내 최초로 '현미 노래교실'을 만들어 연달아서 성공가도를 달렸고 예능 출연을 통해서 재치있는 입담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사실상 이봉조의 유작인 '왜 사느냐고 묻거든'과 2001년 '아내'를 발표하며 히트시켜 현미 독자적으로 가수로서 실력을 입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전에는 재즈, 팝 풍의 보컬로 한국가요, 팝을 불러 히트쳤다면 90년대 이후부터는 성인가요 트로트로 전향한것으로 보인다.

현미 근황

2007년 데뷔 50주년 앨범을 발매하며 자신의 건재함을 알렸고 한국 최초 50주년 기념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50주년 기념 앨범과 공연을 발표하자 실제로 패티김이 전화를 걸어 "형님은 노래하는게 질리지 않냐?"며 "대단하다"고 축하했다고 한다. 현미 자신은 목소리가 나올 때까지 노래를 부를 생각이며, 지금도 꾸준히 활동중이다. 최근에는 특유의 입담과 재치로 주로 외부행사 및 예능 위주로 출현하고 있다.

가수 현미 남자친구 현남친 재혼

현미는 12살 연하와 연애중이다.현미는 띠동갑 연하남과 8년간 연애 중인 사실을 밝혔다.현미는 "내가 35년동안 연예계에서 깨끗하게 살았지 않나. 난 자부한다"며 "스캔들 하나 없이 살아 왔는데 나도 인간이다 보니 가끔 가다 외로우면 밥도 같이 먹고 그런 것"이라고 연애를 하게된 이유를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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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미 결혼 전남편 이봉조

현미 남편 첫만남 러브스토리

현미 이봉조 만남은 현미를 눈여겨봤던 작곡가 이봉조는 현미에게 〈아, 목동아〉라는 팝송 번안곡을 줬고 그때부터 팝과 트로트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불렀다.어린 시절 가족들과 평양에서 넘어온 현미는 생계를 위해 우연히 미8군 부대에서 노래 부르게 되며 음악 인생을 시작하게 됐다.현미 저음 목소리는 미군 관객들을 단숨에 사로잡았고, 당시 밴드(악단) 세션의 마스터였던 작곡가 이봉조도 빠져들었다.(현미 전남편 직업 작곡가 이봉조) 훗날 훌륭한 색소폰 연주자이자 '천재' 작곡가, 영화음악 감독으로 명성을 떨친 이봉조는 현미의 능력을 단번에 알아보고, 그의 인생곡 '밤안개'를 선물하게 된다. 이후 두 사람은 많은 작업을 함께하며 사랑에 빠져 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기의 결혼식을 올린다.이봉조의 노래만 불렀던 현미는 〈보고 싶은 얼굴〉, 〈떠날 때는 말 없이〉, 〈몽땅 내 사랑〉, 〈무작정 좋았어요〉 등 히트곡을 발표하면서 한국 가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현미 전남편 나이 차이 이봉조 나이

현미 남편 나이 차이는 7살로 현미 전남편 이봉조가 연상이었다.

현미 전남편 사실혼 동거남 유부남 작곡가 이봉조

이봉조 현미 이혼 작곡가 이봉조와의 연인관계로 유명했으나, 어느 시기 이후에 이 둘의 관계가 파경을 맞으면서 사실혼이었다는 사실로 밝혀졌다. 현미 측은 이봉조와의 만날 당시부터 이봉조에게 자녀가 있다는 사실은 몰랐으나, 임신 후 결혼까지 약속한 이후에 본처가 찾아와서 알았다고 한다. 실제로 결혼을 약속하고 시댁에도 찾아갔는데, 시어머니라는 분이 참 복스럽게 이쁘게 생겼다면서 가족들 모두가 현미를 좋아해줬다고 한다. 이봉조는 이혼서류까지 보여주며 현미를 안심시키고 살림을 차렸으나 이후에 본처와의 자녀와 자신과의 자녀들의 나이차이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두 집 살림을 해왔다는 사실을 알고 관계를 정리하자고 요구했다고한다. 그러자 이봉조가 같이 죽자며 흉기를 들고 쫓아왔다고 한다. 분위기를 봐서 아이들을 데리고 도망쳐 엄앵란 집으로 피하자 그 곳까지 쫓아왔는데 이 과정에서 신성일과의 물리적 다툼이 있었다고 한다. 이후 현미가 관계를 정리하고 본처에게 돌아갈 것을 요구하고 몇년간 왕래가 없었다고 하며 이후 시누이가 이봉조의 사망 직전 건강이 악화되어 꼭 한번만 찾아가 봐달라는 연락을 받고 현미가 찾아왔는데 이가 다 빠지고 상당히 심각한 상태임에도 본처와의 재결합을 거부하고, 틀니를 낀 상태로 색소폰을 부는 모습에 충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서로 오열했다고 한다. 그 결과 다시 재결합을 약속했는데 재결합 직전에 돌연사로 사망했다고 한다. 생전에 이봉조는 본처와의 합장을 원하지 않았다고한다. 실제로 이봉조측의 가족들이 평생 이봉조가 본처와의 합장을 원하지 않았다며 합장을 거부하자, 본처 자식들의 요구와 현미측의 배려로 합장했다고 한다.

현미 남편 이봉조 사망 이유 사유 원인 사인

현미 전남편 이봉조 사망 이유 원인은 1987년 급작스런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현미 자녀 자식 아이 아기 아들 딸 나이 이름 직업

유부남인 작곡가 이봉조 현미 사이에 사생아 아들 2남 아들이 2명 장남 이영곤(고니, 가수) 차남 이영준 을 낳았다.현미와 이봉조는 20년간 같이 살았다.

현미 가족관계

배우자 사실혼 동거남 남편 이봉조 사망

형제자매 8남매 중 셋째

자녀 아들 슬하 2남

고니 이영곤(첫째아들)

이영준(둘째아들)

친척

둘째며느리:원준희 (가수)

조카딸:노사봉

조카딸:노사연 (가수)

조카사위:이무송 (가수)

조카:한상진 (배우)

조카며느리:박정은

조카딸:아일리 (가수)

색소폰연주가 작곡가 이봉조 프로필

이봉조 나이 사망 학력 고향 가족관계 종교 직업

본관

장수 이씨

출생

1931년 5월 1일

경상남도 남해군 창선면

사망

1987년 8월 31일 (향년 56세)

서울특별시

학력

진주중학교(졸업)

한양대학교 (건축학과 / 학사)

배우자

첫번째 부인 노전숙, 사실혼 관계 현미

자녀

슬하 3남 3녀

종교

개신교

출생: 1931년 5월 1일, 남해군

사망 정보: 1987년 8월 31일, 서울특별시

배우자: 노전숙 (1956년–1987년)

자녀: 이영대, 고니, 이영준, 이지숙, 이영미, 이영숙

가족: 이영숙(장녀); 이영미(차녀); 고니(장남); 고미숙(장자부); 이영준(차남); 원준희(차자부); 이영대(3남); 이지수(3녀)

악기: 색소폰, 테너 색소폰

출생

1931. 5. 1. 경상남도 진주

사망

1987. 8. 31.

학력

1950년 진주고등보통학교 졸업

1958년 한양공과대학교 건축공학과 학사

수상

1979년 칠레가요제 입상

1979년 그리스가요제 입상

1972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경력

KBS 악단 단장

88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공연관계 고문

작품

곡, 앨범, 영화, 기타

출생 1931년 5월 1일

일제 강점기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남해군 창선면

사망 1987년 8월 31일(56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국적 대한민국

직업 색소폰 연주자

테너 색소폰 연주자

작사가

작곡가

편곡가

영화 음악감독

영화음악연출가

영화음악연주감독

장르 재즈, 영화 음악

활동 시기 1954년 ~ 1987년

악기 색소폰, 테너 색소폰

학력 한양공과대학교 건축공학과

배우자 노전숙(본부인), 현미(내연)

가족 이영숙(장녀)

이영미(차녀)

고니(장남)

고미숙(장자부)

이영준(차남)

원준희(차자부)

이영대(3남)

이지수(3녀)

종교 개신교

이봉조 직업 작곡가.이봉조 나이 사망 1931년 5월 1일생 1987년 8월 31일 (향년 56세).이봉조 고향 출생지 경상남도 남해군 창선면

현미 아들 자녀 사진

작곡가 이봉조 작곡 영화 연출 작품활동 필모그래피

작곡 작품

《보고 싶은 얼굴》

《꽃밭에서》

《무인도》

《사랑의 종말》

영화 음악감독 작품

1963년 《가정교사》

영화 음악연출 작품

1965년 《광야의 호랑이》

이외 이력

前 대한민국 문화공보부 문화산업자문위원(1981년)

이봉조 직업 서울특별시 시청 공무원 직책을 잠시 지낸 전력이 있는 대한민국의 재즈 색소폰 연주자, 작사가, 작곡가이다. 본관은 장수이다.

이봉조 어린시절 학창시절

이봉조 과거 경상남도 남해에서 출생하였고 지난날 한때 경상남도 진주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일찍이 미국의 재즈 음악에 심취하였다. 진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52년 한양공대 건축공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시절이던 1954년부터 미8군에서 취미 활동으로 재즈 색소폰을 연주 및 공연하였으며 2년간 휴학한 뒤 1958년 대학을 나왔다. 서울특별시청 토목과 공무원으로 재직하면서 틈틈이 미8군 무대에서 재즈 테너 색소폰을 연주하며 테너 색소포니스트 엄토미의 문하생으로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었다.1961년 서울특별시청 공무원직에서 퇴직하였고 그 후 주직업적으로 재즈 음악가의 길을 걸었다. 작곡가의 입장으로서는 현미, 정훈희 등의 가수를 발굴하였고 뮤지컬 배우 출신의 윤복희를 훈련시켜 가수로 재발탁하였으며 미8군 무대에서 국내가요계에 활동한 인기그룹 Key Boys 보컬 차중락을 솔로가수로 데뷰 하게 된 동기를 부여했고 탱고리듬곡 사랑의 종말이 히트 하였다.

이봉조 작곡가가 된 계기 사연 이유 사유 원인

1931년 5월 1일, 경상남도 남해군 창선면에서 태어났다. 학창시절은 진주시에서 자랐는데, 일찌감치 미국 재즈 음악을 들으며 음악에 대한 흥미를 키워 갔다고 한다. 진주중학교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건축학과 4학년에 재학중이던 시절, 친구의 권유로 미8군에서 음악 활동을 하게 됐다. 거기서 재즈 색소폰을 연주했는데 뛰어난 실력을 인정 받으며 전국에서 공연을 갖게 되었다. 이후 서울특별시청 토목과 공무원으로 일하면서도 미8군 무대에서 재즈 색소폰을 연주했다. 당시 유명 색소포니스트인 엄토미의 제자로서 인정 받을 정도였다고 한다.결국 공무원직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재즈 음악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내연녀였던 현미와 함께 수많은 명작을 내놓으며 명성을 떨쳤다. 애초에 1957년 현미의 미 8군 무대 데뷔곡이었던 '아 목동아!'를 번안 편곡한 사람이 이봉조였다. 1962년 현미의 1집 앨범인 '밤안개'가 공전 히트를 기록하면서 파트너 관계를 공고히 하였다. 그밖에도 정훈희, 윤복희, 김추자 같은 유명 가수들을 발굴하며 스타 작곡가로서 맹활약하였다.

영화 음악 감독 이봉조

1963년, 영화 음악감독으로 데뷔했다. 데뷔작은 '가정교사'. 그리고 이듬해엔 영화음악 연출가로서도 데뷔하였으며, 1967년에는 영화음악 연주감독으로 데뷔했다. 훗날 여러 국제가요제에서도 작곡가로서 본인의 이름을 알렸다. 본처인 노전숙과 자녀들이 모두 개신교 신자여서인지 색소폰 연주곡 CCM 음반도 다수 출판했다.

현미 리즈 과거사진 과사 젊은시절

작곡가 이봉조 결혼 전부인 아내 배우자 전처 와이프 노전숙 현미 이봉조 여자친구 전여친 열애설 연애 스캔들 결별 이별 이혼 재혼

이봉조 결혼 부인 노전숙과 연애 끝에 1956년 결혼식을 올렸다.이봉조 전부인 노전숙 사이에 자녀 1남(이영대) 3녀(이영숙, 이영미, 이지수)를 얻었다. 그의 결혼 생활은 순탄할 줄 알았는데, 1958년에 처음 시작된 자신의 외도로 인하여 나중엔 부인 노전숙과 따로 홀로 살게 되었다고 한다.

이봉조 사실혼 동거녀 가수 현미

이봉조 본처 본부인 노전숙 몰래 가수 현미를 만나 동거하게 된다. 이후 본부인인 노전숙과 가수 현미는 각각 아들을 임신할 때까지 서로의 존재를 몰랐다고 한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현미의 첫째 아들과 노전숙의 셋째 아들이 동갑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다가 외도가 들통나면서 가정 파탄에 이를 지경이 되었다. 이봉조는 현미에게 이혼서류를 보여주면서 안심시킨 반면에 혼인신고를 계속해서 미루면서 지속적으로 두집 살림을 해왔다. 허나 이혼서류마저 가짜였다고 한다.이봉조 내연녀 가수 현미와의 사이에 자녀 2남(고니(이영곤), 이영준)을 두었다.현미와 절친이었던 신성일, 엄앵란 부부의 중재로 큰 분쟁으로까진 발전하진 않았지만, 이후 부인이 있는 본가로 들어가지 않고 쭉 홀로 살다가 1987년 8월 31일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사망 직전에 현미와 재회해서 다시 합치기로 했으나 그 전에 고독사했다. 재회 당시 비참한 모습을 보고 현미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틀니를 끼고 색소폰을 불고 있었다고 한다.

이봉조 전부인 본부인 본처 노전숙 사이에서 낳은 4남매는 모두 훌륭히 성장하였다. 다들 명문대를 졸업하였고 외모도 출중하다. 아들 이영대는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였으며 재학중인 22세에 제26회 사법고시에 차석으로 합격했다고 한다. 서울고등법원 판사를 역임한 뒤 하버드대 로스쿨 유학을 걸쳐 뉴욕주 변호사 자격증도 취득. 현재는 서초동 소재 법무법인 수호의 대표 변호사로 활동 중이라고 한다. 게다가 광고도 찍을 정도로 미남이다. 이화여대 출신 엘리트인 노전숙처럼 딸들도 명문 이화여대, 숙명여대를 졸업해 의사, 교수, 대기업 임원과 결혼하였다.

이봉조 자녀 자식 아이 아기 딸 아들

이봉조 자녀는 1남 3녀는 노전숙 소생, 2남은 가수 현미 소생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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