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침묵의 시선 결말 스포 줄거리 평가 해석
개봉일: 2014년 9월 11일 (이탈리아)
감독: 조슈아 오펜하이머
촬영: 라르스 스크리
수상: 고섬 독립영화상 최우수 다큐멘터리상
수상 후보 선정: 아카데미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상
《침묵의 시선》(영어: The Look of Silence)은 2014년 공개된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제88회 아카데미상 다큐멘터리 장편 영화상 부문에 후보로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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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이 정말 길다. 영상은 고요하고 아름다운데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너무나도 강렬하다!!
nobody(iam_****) 2015.09.03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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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인도네시아에만 한정지을수 없는 교훈을 주는 영화.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은 마이너리티이자 피해자들에게 침묵을 강요한다. 어딜가도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있을뿐이었다
탬니탬니(inul****) 2015.09.08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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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아야할 불편하고 아픈 진실
jah(jah8****) 2015.09.03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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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님. 다음엔 코리아도 방문해주길 바란다. 이 나라엔 당신의 인터뷰를 기다리는(기다려야만 하는) 가해자와 피해자들이 시대별로 존재한다. 가해자들이 권력에 어떻게 포진되어 있는지를 본다면 영화화되었을 때 공포감도 더하리라.
하이랜더(zvez****) 2015.09.10 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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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도 슬픈 영화다. 인도네시아판 킬링필드다. 레드톰이다.
추월산(kimb****) 2015.09.06 22:13
1965년 인도네시아 군부정권 대학살의 기억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 ‘람리’라는 이름은 곧 학살을 의미했다. 그는 비밀리에 사라졌던 100만 명의 사람 중 유일하게 목격당한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알고도 모른척 숨죽여 살아야 했던 사람들에게 ‘람리’의 또 다른 이름은 침묵이자 망각. 그러나 그의 동생 ‘아디’는 50년 만에 형을 죽인 살인자를 찾아가 그 때의 이야기를 묻기 시작하고, 가해자들은 누구보다 자랑스럽고 당당하게 자신이 저지른 소름 끼치는 살인을 증언한다. ‘죽음’은 있지만 ‘책임’은 없는, 인류 역사상 가장 고요하고 잔혹한 이야기!
2014년 8월 28일 베니스 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되었으며, 이후 이탈리아를 포함한 여러나라에서 개봉하였다. 우리나라도 전작인 액트 오브 킬링을 2014년 11월 20일 개봉[1]했는데, 후속작인 본 작을 연이어 상영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말이 있었다. 2015년 9월 3일 한국개봉이 확정되었다. 최대 스크린 31개, 누적관객수 5149명.
오펜하이머 감독이 2015년 8월 내한 당시 밝힌 바에 따르면, 우선 오펜하이머 감독은 피해자인 아디가 가해자를 직접 대면하는 것에 대해 아디의 신변이 매우 위험해질 것을 우려하여 반대했으나, 아디가 직접 찍은 장면(영화 후반부에 아디의 아버지가 본인의 집에서 여기가 어디냐며 공포에 빠지는 장면)과 함께 "우리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화해해야한다"며 오펜하이머 감독을 설득했다고 한다.
인도네시아에선 350회 이상 상영되었고, 30만명 이상이 관람했다고 한다. 특히 첫 상영시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가장 큰 극장에서 상영됐는데, 1500명 수용가능 크기인데 3000명이 넘는 인파가 몰렸으며, 상영 후 특별 손님으로 아디가 직접 극장에 방문해 엄청난 환대를 받았다고 한다.
극 후반부에 등장하는 학살을 자행했던 가정(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아들 둘과 어머니만 지내는 가정)은 오펜하이머 감독과 3달 간 함께 지냈는데, 아버지가 생존 당시 학살에 관해 집필한 책을 바탕으로 오펜하이머 감독에게 극을 꾸며보자고 할 정도로 당시 학살을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영화에 나타나듯 피해자인 아디가 방문했을때 모른다로 돌변하는 태도에 오펜하이머 감독도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아들이 경찰을 불러 촬영진은 급하게 철수했다고 한다. 오펜하이머 감독은 이에 대해 "피해자인 아디를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게 되면 그들이 살해한 그의 형도 자연스레 하나의 인격체였음을 깨닫게되어 자신들의 과거를 포장해온 모든 것이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라 밝혔다.
영화 촬영 후 아디에게 가해질 후폭풍에 우려해 오펜하이머 감독과 인권위원회는 아디를 사건지역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주하도록 도왔으며,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오펜하이머 감독이 지내는 덴마크로 이민갈 계획까지 준비해 놓았다고 한다. 다행히 영화에 관하여 군부가 상영을 방해하긴 했으나, 아디에겐 어떠한 위협도 없었다고.
인도네시아 내에서도 어두운 현대사를 재조명했다는 점에서 엄청난 화제거리가 되었지만 과거 수하르토 독재정권과 연관된 세력들이 침목의 시선 상영을 이런저런 방법을 동원해서(심지어 깡패를 동원해서 협박하기까지 했다.) 상영을 막을려고 했기 때문에 상영이 여러차례에 걸쳐서 취소되는 등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상영방해로 인해 영화가 더더욱 관심을 끌게 되었고 조코 위도도 대통령이 영화를 직접 관람할 정도가 되었다.
이 영화와 전작의 영향으로 인도네시아 일부에선 소재가 되는 1965년 인도네시아 학살사건에 대해 학교 역사수업 때 교과서에 나오는 역사와 대안으로 교과서가 아닌 진실된 역사를 함께 가르치기도 한다고 한다.
<액트 오브 킬링>은 공포와 거짓 위에 세워진 사회가 만들어낸 결과를 드러냈고, <침묵의 시선>은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그 속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침묵의 시선>에 두 명의 전 학살단 대장이 나를 북 수마트라의 스네이크 강둑으로 데리고 가는 장면이 있다. 그 강둑 빈터에서 그 둘은 자신들이 군인들을 도와 어떻게 만오백 명의 사람들을 죽였는지를 신이 나서 몸소 재연까지 하며 보여줬다. 그 장면 마지막에는 두 사람은 그곳에서의 행복했던 기억을 추억하며 함께 기념사진을 찍는다. 그 장면을 찍었던 당시는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끔찍했던 기억 중의 하나이고, 그것을 시작으로 나는 이 두 다큐멘터리를 만들게 되었다.
사실 나를 정말로 무섭게 만든 것은 학살 자체가 아니라 그 두 사람이 미리 만나서 말을 맞춘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그 두 사람은 자신들이 저지른 짓을 신나게 떠들며 자랑했고 거기에 대해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그때 나는 이러한 거리낌 없음이 사회 전체에 만연함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 두 작품을 1965년에 발생한 사건에 대한 역사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학살이 가져온 결과를 보여주는 현재에 대한 다큐멘터리’라고 말한다. 그렇게 나온 첫 번째 작품이 <액트 오브 킬링>이 되었고 이 다큐멘터리는 거짓으로 포장된 사회 속에 사는 가해자들이 자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침묵의 시선>은 50년 동안 공포와 침묵 속에 살 때 사회 전체와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말하는 다큐멘터리이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에 관한 영화는 대부분 그들을 영웅 같은 주인공으로 만드는 진부함을 보여준다. 관객들은 가해자가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 알고 있고, 현재의 우리는 그런 끔찍한 재앙과는 무관한 안전한 세계 속에 살고 있으며, 우리는 가해자들과는 다른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좋은 편’이다라는 안도감을 가지려고 생존자를 영웅으로 그리는 것은 우리 자신을 속이기 위해 생존자들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생존자들의 뼈 아픈 과거를 모욕하는 짓인 동시에 재앙 속에서 살아남아 폭력 속에 갈가리 찢긴 삶을 유지하며 공포 속에서 침묵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흔한 진부함 속에서 똑바로 길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침묵 그 자체를 들여다봐야 한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침묵의 시선>은 공포 속의 침묵에 대한 한 편의 시이다. 그 시는 침묵을 깨야 하는 필요성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침묵이 깨졌을 때 드러나는 고통을 보여준다. 어쩌면 이 영화는 침묵에 대한 기념비일지 모른다. 그 기념비는 우리에게 아무리 우리가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를 원하고, 외면하고, 다른 일로 덮어버리고자 하더라도 파괴된 것은 원상 복귀될 수 없다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것이다. 우리는 나아가는 것을 멈춰야 한다. 멈춰서 파괴된 삶을 알아차리고, 그 파괴된 삶이 가져오는 침묵에 안간힘을 쓰며 귀 기울여야 한다.
전 세계 70개 이상의 영화상을 휩쓸며 해외 유력 매체와 평단의 극찬 세례를 끌어낸 <액트 오브 킬링>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이 이번엔 그보다 더욱 대담하고 과감한 신작 <침묵의 시선>으로 돌아와 다시 한 번 세계 영화계에 거대한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침묵의 시선>은 1965년 인도네시아 100만 명 대학살 사건으로 형을 잃은 ‘아디’가 50년 후 자신의 형을 죽인 사람들을 찾아가 직접 인터뷰를 진행하는 도발적인 방식의 다큐멘터리로, 공개된 직후 전작 <액트 오브 킬링>을 이어 올해에도 역시 아카데미시상식 최고 다큐멘터리부문의 유력 후보로 점쳐지고 있다. 위험천만하고 파격적인 방식으로 또 한 번 세계를 놀라게 하며 해외 유력 매체와 평단의 폭발적인 찬사를 끌어낸 <침묵의 시선>은 2014년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 국제비평가협회상, 인권의밤상, 골든마우스상, 유럽비평가협회상을 받으며 5관왕을 석권한 데 이어 2015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평화영화상을, 2014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부산시네필상을 수상하는 등 일찌감치 전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37개의 영화상을 휩쓸었다. 그뿐만 아니라 2015년 토론토영화제 공식 초청, 텔룰라이드영화제 공식 초청 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영화제로부터 끊임없는 러브콜을 받고 있어 70개 이상의 영화상을 휩쓸었던 <액트 오브 킬링>의 유례없는 아성을 뛰어넘을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국내 개봉 확정과 동시에 절대 놓쳐선 안 될 올해의 마스터피스로 씨네 필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침묵의 시선>은 단 두 편으로 영화사를 뒤흔들며 전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자리 잡은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의 충격적인 신작이다. 1965년에 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났던 100만 명 대학살 사건에 대한 집요하고 깊이 있는 통찰로 ‘학살은 학살로서 직시해야 한다’는 사회적 화두를 던졌던 전작 <액트 오브 킬링>에 이어 이번 <침묵의 시선>은 학살이라는 참사 위에 세워진 거짓된 사회가 어떻게 찢어져 있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도네시아인들이 진실과 화해, 그리고 정의를 얼마나 바라는지를 보여준다.
그리하여 파렴치한 가해자에게 분노를 느끼도록 만들었던 <액트 오브 킬링>과는 달리 <침묵의 시선>은 분노하던 이들이 직접 일어나 행동하도록 만든다. 이렇게 또 하나의 뜨거운 문제작을 가지고 나타난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을 향해 해외 유력 매체와 평단은 “영화 사상 가장 위대하고 강렬한 다큐멘터리다.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실로 깊은 통찰!(Errol Morris)”, "차라리 이 영화를 보지 말았어야 했다. 도저히 떨쳐 버릴 수가 없다.(Wall Street Journal)", “마음을 사로잡는 오펜하이머의 무한한 스토리텔링 능력(Playlist)”, “긴 밤 끊임없이 울리는 매미 소리처럼 머릿속을 맴도는 강렬한 영화(Peter Howell)”, “올해 최고의 영화 중 하나. 진정한 예술작품!(Huffington Post)”, “절대 잊혀선 안 될 21세기 가장 중요한 다큐멘터리(Twitch)” 등 동시대에 만날 수 있는 가장 강렬하고 완성도 높은 다큐멘터리라는 찬사를 보냈다.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이 그간 수많은 인터뷰를 통해 “<침묵의 시선>은 현 정권을 고발하는 영화가 아닌 침묵을 강요당한 사람들에 대한 영화”임을 밝혀왔던 만큼, <침묵의 시선>을 통해 관객들은 단순히 감춰진 역사를 인식하고 분노하는 것뿐만 아니라, 알고 있었지만 두려워 피해왔던 진실을 바로 마주하고 이야기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침묵의 시선>은 안경사 ‘아디’가 친형 ‘람리’를 죽인 살인자들을 50년 만에 직접 찾아가 학살에 관해 묻는, 지금껏 볼 수 없었던 도발적이고 파격적인 방식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자칫 피해자의 시선으로 만들어진 전형적인 다큐멘터리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지만 <침묵의 시선>은 피해자의 ‘입장’을 그리며 감정적 동요나 동정을 구하는 영화가 아니라 그의 시선을 빌려 학살로 인해 야기된 결과와 현재의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다. 주인공인 아디의 형 람리는 인도네시아 대학살에서 무척 중요한 이름이다. 소리소문없이 실종 처리되어 사라졌던 100만 명의 인물 중 유일하게 목격자를 가진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학살이 모두 끝난 후에야 태어난 아디는 모든 것이 망가진 가정 안에서 살며 학살로 인한 트라우마를 가져야 했지만, 그 사건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쉽게 분노에 사로잡히거나 복수를 꿈꾸는 대신 차분하고 담담하게 가해자에게 당시의 학살에 관해 묻고 그들이 자랑스럽게 자신이 저지른 살인에 대해 떠드는 동안 그 이야기를 가만히 듣는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자신이 바로 그 학살의 피해자 가족임을 밝히는 순간 형체를 드러내지 않고 있던 공포와 숨 막히는 긴장감이 서서히 수면 위로 올라온다. <침묵의 시선>은 살기 위해 침묵 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그러한 사회를 외면하고 책임을 회피하던 이들로 하여금 50여 년의 침묵을 깨게 만드는 전례 없는 다큐멘터리로 묵직한 여운을 선사할 예정이다.
화려한 색감과 초현실적인 비주얼로 무장한 채 대학살을 재연하는 살인자들의 이야기로 감각적인 미장센을 선보였던 <액트 오브 킬링>과는 달리 <침묵의 시선>은 그 어느 때보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풍경으로 정적미를 뽐낸다. 그러나 이러한 미학적 이미지를 앞세운 <침묵의 시선>은 피해자가 직접 가해자를 찾아가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사건이었던 인도네시아 100만 명 대학살이라는 주제에 관해 인터뷰하는 파격적인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뜻밖의 공포를 선사한다. 조용한 밤에 울리는 풀 벌레 소리와 호젓한 시골 풍경, 그리고 단지 응시하는 듯한 카메라의 시선은 살아남은 자들 사이에서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학살과 죽음의 공포를 비추고 아직도 인도네시아 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폭력의 그림자를 보여준다. 이렇게 아름다운 영상 속에 숨겨진 소름 끼치도록 잔인한 이야기는 이미지와 메시지의 틈을 벌리며 그 모순에서 기인하는 독특한 분위기로 보는 이를 압도한다. 특히, 생생하고 다채로운 색감에도 불구하고 가해자를 말없이 바라보는 아디의 놀라울 정도로 차분한 시선이나,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아들을 떠올리며 과거 속에 갇혀 사는 노부모의 클로즈업된 얼굴은 도리어 뻔뻔하고 파렴치하게 책임을 회피하는 가해자의 모습과 병치 되어 격정적인 감정의 파도를 불러일으킨다. 아이러니에서 기인하는 기묘하고 아름다운 영상미로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의 새로운 다큐멘터리 <침묵의 시선>은 역대 가장 고요한 충격을 안기며 선명하고 강렬한 후유증을 남길 것이다.
1965년 인도네시아 정부는 군대에 의해 전복당했다. 인도네시아의 첫 번째 대통령이자 비동맹 운동의 설립자, 네덜란드 식민주의에 대항한 국가 혁명의 지도자인 수카르노는 물러나고 수하르토 장군의 보수 정권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네덜란드 식민주의에 대항하는 핵심 단체로서 투쟁을 벌였던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은 수하르토 대통령(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을 지지했으나 수하르토가 정권을 잡으면서 바로 외면당했다.
쿠데타 전날까지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공산국가를 제외하면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공산당이었다. 선거를 통해 공식적으로 정권을 잡았고 인도네시아 전체 노동조합을 포함하여 소작농 협동조합들과 연계하였다. 그들에게 가장 큰 안건은 농지 개혁과 외국인 소유의 탄광, 석유, 농장 회사들이었다. 그들은 300년 동안 식민지 지배를 받으며 극도의 빈곤에 시달리던 인도네시아 국민의 이익을 위해 방대한 천연자원을 되찾아 이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1965년 군사 쿠데타 이후, 군사 독재에 반대하는 사람은 공산주의자로 몰렸으며, 노동조합, 소작농, 지식인들, 중국인을 포함해 식민지 시대의 후유증과 불평등한 부의 분배에 고통받던 사람들은 모두 공산주의자로 몰렸다. 일 년이 안 되는 시간 동안, 서방 세계의 적극적 지원을 받으며 백만 명에 가까운 소위 ‘공산주의자’들이 살해당했다. 미국에서는 이 대량학살을 공산주의에 대항한 승리로 대서특필하며 기념했다. 타임지는 ‘아시아에서 일어난 최고의 소식’이란 기사를 실었고, 뉴욕 타임즈에는 ‘아시아의 빛줄기’라는 헤드라인 기사가 나갔으며 이들을 지지하는 워싱턴 정부를 찬양했다.
중국 정부와 인도네시아 정부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서 미국 정보부 CIA는 18~19세기에 인도네시아로 이주한 중국인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도록 조장했다. 인도네시아 공산당, 그와 연관된 노동조합, 협동조합의 일원인 농촌 마을 사람들 대한 학살은 모두 미국의 지지 속에서 이루어졌다. 미국은 공산주의 ‘초토화’ 없이는 새로운 인도네시아 정부 역시 결국 인도네시아 공산당에 기반을 두게 될지도 몰라서 두려워했다.
인도네시아의 많은 지역에서 살상을 위해 시민들을 동원했고 준군사조직을 조직해 군대의 지지를 받으며 기본적인 훈련까지 받게 하였다. 북 수마트라 지역과 다른 지역에서 준 군사조직은 대부분 조직폭력배로 이루어졌다. 대량학살 이후, 인도네시아 정부는 ‘공산주의자들 처단’을 애국 투쟁으로 포장했고 준군사조직과 조직폭력배를 영웅으로 대접했다. 그 결과 그들은 ‘권력’이라는 대가를 얻을 수 있었다. 그 조직폭력배들과 심복들은 권력을 잡고 반대자들을 처리했다. 1965년-1966년에 벌어진 대량학살의 핑계는 1965년 10월 1일 밤 여섯 명의 군인 장군들의 암살이었다.
1965년 10월 1일, CIA에 매수된 우익 군부 세력에 대해 불만을 품은 인도네시아의 젊은 영관급 장교들이 조직한 9.30 거사에서 여섯 명의 인도네시아 장군들이 암살당했다. 그들은 그 시체를 도시의 남쪽 우물에 던져버렸고 동시에 9.30 거사의 군대는 국가 라디오 방송국을 장악하여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우익의 군대 도당으로부터 수카르노 대통령을 보호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들은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그런 거사가 일어났는지 알기도 전에 패배했다. 암살당하지 않고 살아남은 수하르토 장군이 빠른 반격을 펼치며 하루 만에 자카르타에서 거사를 일으킨 군대를 몰아냈기 때문이었다.
수하르토는 인도네시아 공산당을 거사의 배후라고 지목하며 비난했고 공산당과 연루된 사람들의 처단을 비밀리에 지휘했다. 수하르토의 군대는 15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거사에 연루되었다고 비난했다. 이로 인해 일어난 이 학살은 20세기의 가장 끔찍한 피의 잔치 중에 하나로, 수십만의 사람들이 자바 중심부, 동 자바, 발리 그리고 북 수마트라에서 군대와 민병대에 의해 대략 1965년 말부터 1966년 중반까지 대량학살 되었다. 국가 재난 속에 수하르토는 점차 권력을 찬탈하기 시작했고, 1966년 3월에 스스로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대량학살은 그들의 표면적인 명분이었을 뿐이다. 9.30 거사는 소수에 의해 조직된 작은 규모의 음모였고 이 사건으로 총 12명이 죽었다. 그러나 수하르토는 이것을 과장하여 전국 규모의 음모론으로 만들며 100만 명의 대량학살을 주도했다. 심지어 시골에 살면서 글도 모르는 소작인까지도 거사의 책임을 묻는 살인자로 내몰리며 공산당과 연루되어 죽임을 당했다.
인도네시아 정부와 군부 조직은 1998년 정권을 떠나기 전까지 약간이라도 위험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공산당을 철저히 금지했다. 정권 내부에서 논의된 주요 쟁점은 ‘공산주의에 잠재된 위험성’이었다. 이 끝나지 않은 공산당 박멸은 수하르토 정권의 존재 이유였다. 30년 이상 인도네시아를 지배한 정권이 초창기에 했던 합법적 행동은 수하르토 대통령이 1965년 10월 3일에 내린 ‘질서 회복’이란 명령이었다. 그것은 긴급 명령이었다. 그러나 수하르토에게 이 ‘긴급’은 영원히 계속되었다.
수하르토는 자신의 독재정권에 정당한 이데올로기를 세우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9.30 거사를 쳐부순 국가의 구원자로 포장했다. 그의 정권은 교과서, 기념관, 거리의 이름, 영화, 박물관, 기념행사, 국경일 등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끊임없이 선동선전을 하면서 대중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갔다. 수하르토 정권은 인도네시아 공산당을 형언할 수 없는 악마로 묘사하고 역사의 중심에 9.30 거사를 놓으면서 자신들의 존재를 정당화했다. 그리하여 수하르토 정권 아래에서 반 공산주의는 신성한 의례, 성지를 갖춘 하나의 종교가 되었다.
대규모로 벌어지는 반공산주의 폭력이 인도네시아에 받아들여지는 풍경은 주목할 만한 점이다. 살인을 저지른 군인과 민간인 둘 다 그에 대한 책임을 외면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더라도 적게나마 이미 알려진 사실을 봤을 때 군부가 가장 큰 책임을 지고 있고, 고위층 관료에서부터 살인이 나왔으며, 끊임없는 폭력이 행사되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9.30 거사에 대한 가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언론을 장악한 수하르토 관료 패거리들은 공산당이 다시 싸움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다는 불안감을 대중 사이에 심었다. 만약에 군부에 의한 이러한 의도된 도발이 아니었다면, 대중들은 공산당을 9.30 거사 후에 힘을 잃고 언젠가 스스로 사라질 정당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었다. (군부는 1965년 10월 초 이후부터 공산당을 향한 분노를 계속 자극했고 미국 정부는 적극적으로 인도네시아 군부를 지지했다) 군부는 민병대가 나서야 한다며 계속 자극했고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었으며 군수 물자를 지원해주었으나, 그들의 주장대로 광분한 폭력을 행사하는 농촌 마을 사람들은 전혀 없었다.
수하르토의 군대는 공공의 사형보다는 의문의 실종을 택했다. 군대와 민병대들은 대규모 대량학살을 비밀리에 저질렀다. 그들은 밤에 감옥에서 포로들을 데리고 멀리 떨어진 장소로 가 죽이고는 강에 버리거나 큰 구덩이를 파서 대량으로 묻었다.
인도네시아 현대 역사의 비극은 군대가 저지른 1965-66년 대량 학살뿐 아니라 합법적이고 정상적인 통치 관리로서 대량학살과 심리전을 보는 살인자들의 권력 성장에 있다. 여섯 명의 군사 장교의 시체가 버려진 우물 옆에 지어진 기념관에 허리를 구부리고 추모하면서 스스로 합법화하는 정권은 오히려 나라 전체에 셀 수도 없이 많은 집단 대형 무덤들을 남겼다. 그와 비슷하게 1975년과 1999년 사이에 일어난 동티모르 점령에서는 수천 명의 사람들을 죽이고 묻어버렸다. 인도네시아 군도에 있는 대형 무덤들 하나하나는 독단적이고, 비밀스러운 공권력을 보여준다.
비교적 작은 사건(9.30 거사)에 대한 집착과 역사적으로 거대한 사건(1965-66년 대량학살)의 말소는 사라진 희생자 가족들에 대한 감정이입과 공감을 막아 왔다. 1965년 10월 1일에 여섯 명의 군사 장군들의 시체가 버려진 우물 옆에 기념비가 세워졌으나 진압이란 이름으로 자행된 수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죽임을 당한 대형 무덤들 옆에는 어떤 기념비도 찾을 수 없다.
1965년 9월 30일에 누가 장군들을 죽였는지에 대해 집중하면서 백만 명 이상의 사람들을 죽인 사건에 대한 관심을 교란시킨다. 수하르토의 정권은 장군들을 죽인 잔인한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끝없는 선동선전을 만들었다. 그리고 아직도 오늘날 대량학살에 대한 대부분의 토론은 장군을 죽인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토론으로 대체된다. ‘누가 장군들을 죽였냐’라는 토론은 나에게 너무나 기괴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그 사건은 <액트 오브 킬링>에 나오지 않는다.
르완다의 대량학살은 후투족인 르완다의 대통령 쥐베날 하브자리마나가 키갈리로 가던 중 비행기가 저격당하면서 촉발되었다. 그 후 100일 동안 일어난 8만 명의 투치족와 후투족 대량학살보다 누가 비행기를 저격하였는지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비양심적이다. 비슷하게 누가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을 저질렀는지는 홀로코스트를 이해하는데 전혀 무관하다.
불만을 가진 군사 장교들이 여섯 명의 장군들을 죽인 것이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명령에 의한 것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세계 역사에 남을 끔찍한 대량 학살에 대한 관심을 돌리기 위한 것일 뿐이다. 만약에 르완다에서 1994년에 누가 대통령의 비행기를 저격했는가에 대한 질문을 했다고 상상해보자. 이것은 그 살인자가 아직도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볼 수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