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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파 사건 생존자 사형 영화 살인 유씨 김기환 두목 여자 멤버 조직원

by 제로스 2024.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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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파 사건

날짜 1993년 4월 ~ 1994년 9월

참여자 지존파 두목 김기환

피해

사망자 5명

조사

1994년 9월 21일에 검거하여 6명외 사형집행

1990년대에 활동한 대한민국의 연쇄살인조직.원래 이름은 지존파가 아니라 '마스칸'.1 지존파라는 이름은 이들을 검거한 고병천 수사과장이 지어준 이름으로, '지존파'라는 이름은 이들이 범죄를 저지르기 전에 훈련을 할 때 이마에 지존(至尊)이라고 쓰인 두건을 두르고 훈련을 했다는 증언과 두목인 김기환의 별명이 '지존'이었던 것을 바탕으로 고병천 반장이 조직원들과 합의 하에 지은 것이다.범죄 조직을 뜻하는 XX파라는 이름은 경찰이 관리 편의를 위해 임의로 붙인 것이지 조직 자신이 칭하는 게 아니다. 그런데 당시 언론은 이들이 홍콩 영화를 보고 지은 것으로 보도했고 홍콩 영화를 좋아하던 청소년들이 덩달아 욕을 먹었다. 여기에 표창원도 덩달아 자신의 저서인 '한국의 연쇄살인'에 무협영화 같은 대중매체의 안 좋은 영향의 예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다만, 지존 자체는 홍콩 영화에서 나온 것인 것은 사실이다. 실제로 파벌의 대장이 지존이었기 때문에 아예 무관하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후술할 비슷한 시기에 박성배 감독의 영화 <해적>도 지존파 사건으로 인한 공연윤리위원회의 폭력물 검열 강화로 전체의 93컷이 잘려 개봉되었다.

일반적으로 연쇄 살인자는 단독으로 활동하는 사례가 많으며 두 명 이상이 개입된다고 해도 서로 부부나 연인, 혈연인 경우가 많은 것과 비해2 약간의 인연만 있던 타인들이 오직 살인을 위해서, 그것도 6명이라는 대규모 집단을 조직한 것은 세계적으로 상당히 특수한 사례에 속하며, 해외에서도 비슷한 사례는 일본의 어둠 사이트 살인사건, 미국의 찰스 잉 & 레나드 레이크 정도 뿐이라 당시에 CNN에서 취재를 오기도 했다.이들이 준 충격은 가히 엄청났으며 천하의 공영방송 앵커들조차 이들의 범죄를 전하면서 말을 더듬으며 차마 전할 수 없다는 표현을 반복할 정도였다. 범죄 내용도 내용이지만 하필 사건이 공개된 시기가 추석 연휴여서 그 충격은 더 컸다. 지금이야 치안이 좋아져서 상대적으로 보도가 더 자주 이루어지기에 충격이 오히려 적지만, 사건 당시에는 상대적으로 강력범죄에 대한 보도가 잘 이루어지지 않던 시기였다.3 세상 어디에서도 듣도보도 못한 유형의 범죄였기에 당시엔 충격이 상당히 컸고, 2020년대 기준으로 봐도 발상 자체가 상당히 엽기적인 범죄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사람들에게 최악의 범죄 및 살인사건을 꼽으라면 종종 거론되는 사건이기도 하다.

자신들의 범행 동기를 불평등한 사회 구조로 돌렸는데, 개인이 아닌 사회를 대상으로 한 보복성 살인이라는 것에 사회 전반적으로 큰 파장이 일었다. 이들은 행동강령도 있었는데 당시 상당히 충격적인 내용이었다.돈이 많은 자를 증오한다.10억을 모을 때까지 범행을 계속한다.배신자는 죽인다.여자는 어머니도 믿지 말라.어처구니 없게도 4번째 강령을 어겨서 검거되는데, 납치한 여자도 그렇지만 아지트 살림을 위해 여자를 포섭했었다. 또한 조직원 중 한 명의 여자친구였고 당연히 처벌받았다.

지존파의 결성 계기는 대학입시부정사건에 분노하여 가진 자들에 대한 증오심으로 그들을 벌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실 지존파는 두 번 결성되었다.1992년 말, 김기환은 고소득자들의 돈을 갈취하고 살해하는 범죄조직을 조직할 계획을 세울 결심을 하고, 탄광 일을 할 때 알게 된 조 모 씨에게 살인을 제외한 범죄 계획을 알려주며 설득에 나섰다. 평소 조 씨의 경제적 여건과 성정을 알고 있던 김기환은 설득에 성공했고, 조 씨의 친구, 도박을 하며 알게 된 사람 세 명을 포섭해 조직을 결성했다. 하지만 그 범죄 계획에 살인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조직원들이 이를 꺼려 결국 해체되었다.1차 조직 결성 실패 후 1993년 초, 갈 곳이 없어진 김기환은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탈퇴한 전 멤버의 소개로 '가희산장'이라는 비밀 도박장에서 도박을 하며 허송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김기환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이번엔 더 못 배우고 부자에 대한 증오심이 훨씬 강한 자들을 포섭하려 했고, 실패 요인을 없애기 위해 대화술 관련 서적을 읽으며 더 철저하고 견고한 조직을 만들 계획을 세운다. 그 해 3월, 고향 후배인 강동은과 접촉해 그들에게 범죄 계획의 일부를 조금씩 흘려가며 차분히 설득에 나섰다. 자기 의지로 가담할 수 있게 1개월이라는 유예기간도 줬다. 강동은이 적극적으로 찬성을 외치자 강동은의 교도소 동기인 문상록, 후배 송봉우도 동의하여 세 사람은 조직에 가입하게 된다.

김기환 외 세 명은 전주로 이동해 함께 생활하며 조직 결성과 범죄에 대한 구체적 논의를 시작했다. 그러던 중, 강동은이 교도소 동기였던 백병옥을 떠올렸고 당시 천안에서 막노동을 하던 백병옥을 합류시켰으며 문상록은 같은 곳에서 일했던 강문섭을 강동은에게 소개해 포섭했다. 이주현은 같은 해 6월, 평소 "은행강도가 되고 싶다."던 김현양을 김기환에게 소개해 조직에 합류토록 했다.이렇게 조직은 그해 7월, 포커판에서 김기환을 중심으로 강동은, 김현양, 문상록, 강문섭, 백병옥, 송봉우를 축으로 하여 조직되었다.

이미 한 번의 실패 경험이 있었기에 김기환은 조직의 유지에 굉장히 신경 썼는데, 평소 "배신한 자는 반드시 처단한다.", "잘 때 내 가슴을 열어놓고 잘 테니 나가고 싶다면 내 가슴에 칼을 꽂고 가라. 다만 그러지 못하면 지옥까지 쫓아가 죽일 것이다."라고 하는 등 조직의 기강을 흔드는 자에게 용서란 없으며 조직에 합류한 이상 벗어날 수 없음을 강조했다.후에 김기환의 수감 후 부두목이 된 강동은이 식사 준비와 잡일 등을 시킬 여성 조직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자신의 애인이자 영광의 J주점 종업원 이경숙을 합류시켰다. 하지만 이경숙이 가담한 지 이틀 만에 전원 검거되었으며, 그녀는 살인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다는 이유로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지존파 멤버 조직원

지존자 두목 김기환

金基煥, 범행 당시 나이 26세(1968년생).

지존파 두목이다. 전라남도 영광군 출생. 3세에 아버지가 사망한 후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다. 하지만 초등학교 6년 내내 우등상을 받았고 반장을 해본 경험도 있었으며 반면에 생활기록부 행동발달사항엔 '지도력이 강하고 급우를 잘 통솔하나 간섭이 좀 심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법정에서 최후진술을 할 때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크레파스를 살 돈이 없어서 안 가져 갔더니 선생님이 ‘그러면 친구들 것을 뺏어서라도 가져왔어야지!’라고 혼냈다. 그래서 친구들의 준비물을 훔치기 시작했고, 그러면 선생님은 날 혼내지 않았다. 난 선생님이 가르친 대로 인생을 살았을 뿐이다.”라며 자신의 범죄를 남탓으로 돌리는 등 전혀 뉘우치는 기색도 없이 뻔뻔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중학교 시절에도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고 운동 능력과 글 짓기 실력도 우수했다. 이로 미루어볼 때 다른 조직원들보다 지능적으로도 매우 우수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 덕분에 집단의 우두머리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생활기록부 상에 준법 정신이 낮은 수준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중학교 2학년 재학 중에 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지시고 형마저 병에 걸리자 학교를 자퇴하고 돈을 벌기 위해 부산으로 떠났다. 부산으로 내려간 후 가장 먼저 취직한 곳은 한 신발공장이었다. 월급의 대부분은 어머니께 보냈고 중단할 수 밖에 없었던 학업에 대한 미련이 남았는지 틈틈이 검정고시 준비도 했다. 그 후 몇 년 간 대한석탄공사에서 잡부 일을 하거나 공사판 등을 전전하며 나름 열심히 일을했지만 나아지지 않는 현실에 좌절하고 검정고시 준비도 그만두고 얼마 후에 직장도 그만둔 뒤 영광 고향집으로 돌아와 잠시 부모형제들과 지냈다. 그 와중에 도박에 빠져 도박으로 인한 빚도 지게 되었다. 포커를 잘 해서 ‘지존’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이 지존이란 별명은 조직 결성 후 부하 조직원들에 의해 ‘두목’을 대신하는 칭호로 쓰이게 된다.이런 저런 이유로 돈이 필요했던 김기환은 ‘가진 자들을 징벌한다.’는 명분으로 ‘부자들의 돈을 갈취하여 살해하는 조직 결성’이라는 무시무시한 계획을 세우기에 이르고, 조직 결성을 위해 각종 범죄 관련 서적은 물론이고 처세, 대화술 관련 서적을 탐독했다. 첫 조직 결성은 실패하고 고향 후배 강동은 등을 끌어들여 현재 잘 알려진 멤버들로 지존파를 결성하여 두목이 된다.

조직 결성 후 담력을 키운다는 명목으로 조직원들에게 지리산에서 일주일 간 물 한 병과 칼 한 자루로 버티도록 훈련을 시키고 조직원들과 막노동을 해서 모은 돈으로 어머니가 기거하던 집을 살인 아지트로 개조한다. 평소엔 동네 형처럼 조직원을 대했지만 강압적인 리더십으로 조직원들을 복종케 했으며 조직의 결속력을 높이기 위해 첫 번째 피해자인 최미자 씨와8 송봉우 살해를 주도한다. 실제로 조직원들은 송봉우 살해 당시 두목인 김기환에게 잘 보이기 위해 경쟁적으로 잔혹하게 살인 행위를 했다고 한다.아지트 완공을 얼마 앞두고 실전에 돌입하기 전인 1994년 6월 17일 김현양의 생일날 조직원들과 술을 마신 후, 밤 중에 불현듯 '아는 선배의 집에 보일러 수리를 하러 가겠다'며 자리를 비운 김기환은 선배의 집에서 자고 있던 선배의 중학교 1학년 조카를 성폭행해 체포된다. 이때 김기환은 범행 사실을 순순히 자백했는데, 전문가들은 김기환이 직접적인 범행으로부터 손을 떼고 중죄를 면하기 위해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하기도 했다. 강간치상죄로 징역 5년을 선고 받고 광주교도소에 수감된 김기환은 수감된 후에도 강동은을 부두목으로 임명해 부하 조직원들에게 범행을 지시했다. 수감되어 있는 중에도 그의 말은 나머지 조직원들에게 법이었다.

후에 지존파 전원이 검거되어 서울구치소로 이전된 뒤 1995년에 사형이 확정된다. 사형선고를 받고 나오는 길에 "야! 전두환, 노태우는 무죄인데 나는 왜 유죄여? 이건 세상 법이 좆같은 것이여!"라는 어록을 남겼는데, 사실 전두환과 노태우 건은 본인 사형 선고 이후의 일이고 지존파에게 내려진 사형이 잘못된 것도 아니다.지존파 관련 사진이나 영상에서 두목 김기환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든데 김기환은 지존파가 검거되기 3개월 전부터 교도소에 수감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지존파 사건으로 기소 된후 , 구치소 수감생활 중 종교를 가질 수 있었는데, 천주교로 귀의하였다고 한다.1995년 11월 2일 , 전원 검거 및 구속된 지 불과 1년 하고 2달도 채 약간 안되어 대규모 사형집행이 이뤄졌고, 명단에 지존파도 포함되어 조직 검거 불과 며칠 전 식사조리 및 대접 등 을 목적으로 영입한 조직원 강동은의 여자친구인 이경숙을 제외하고 6명 모두 교수형으로 사형 집행되었다.

김기환을 포함하여 사형이 집행된 지존파 조직원들은 대부분의 유가족들이 시신 인계를 거부하여 이를 알게 된 그들을 검거한 고병천 전 강력 수사반장이 대신 인수하였고 시신 화장 후 아내와 함께 지존파들의 장례식을 치뤄주었다고 한다.두목 김기환은 7시 35분에 이끌려왔다. 최후로 할 말이 있는가라고 묻자 “죄인이 할 말은 없으나 남자는 자기가 한 말은 끝까지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다. 회개하기보다는 자기가 했던 말을 합리화하려는 것 같았다. 그 후 냉소하는 듯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고. 그러나 마지막에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어머니께 내가 새 인생을 걷는다고 전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7시 55분에 집행됐고 8시 8분에 절명했다.사형 집행 된 후, 이하 조직원들과 함께 전원 시신 화장되어 그의 시신 역시 사형수 공동묘지에 묻혀졌다.

 

지존파 멤버 강동은

姜東銀, 검거 당시 나이 21세(1973년생).

부두목이다. 고등학교를 중퇴 했고 특수절도, 폭력전과 2범이다. 김기환의 국민학교, 중학교 후배였다. 다른 조직원들과는 달리 집안이 찢어지게 가난한 것은 아니었지만 역시 넉넉한 가정형편은 아니었고 형제가 많아 부모님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학창시절부터 폭력적인 성향이 짙어 급우들을 자주 폭행했고 학업에는 관심이 없었다. 생활기록부 상에는 '매사에 무관심한 성향', '바른 생활이 요구됨'과 같은 내용이 적혀있다. 고등학교 재학 중에 동창인 문상록과 함께 이웃집의 벼 두 가마니를 훔쳤다가 절도 전과를 갖게 된다. 밴드부에 가입해 음악에 취미를 붙여보려고도 했으나 선배들의 가혹행위가 심해 그만두었다. 그 후 방황하다가 결국 문상록과 가출해 상경한 후 막노동을 시작했다. 전과삭제를 위해 4년 간 열심히 일해 모은 돈 1500만원을 변호사에게 주었다가 돈만 날렸을 뿐 여의치 않자 그 때부터 부유층에 대한 적개심이 생겼고, 경제적 여건이 나아지지 않자 귀향해 도박에 빠졌다가 김기환을 만나 조직에 합류하게 된다. 김기환에게 충성을 보이며 문상록, 백병옥, 강문섭 등을 소개시키는 등 초반에는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두목인 김기환이 강간치상으로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자 부두목으로 임명되어 수감 중인 김기환을 수 차례 면회해 범행 지시를 받았다. 학창시절부터 폭력적인 성향이 짙었고 조직의 부두목이 되기도 하는 등 겉보기엔 범행에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비춰지지만 사실 소심해 거의 김기환으로부터 범행을 지시 받아 나머지 조직원들이 실행하도록 전달하는 역할만 하고 범행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첫 피해자였던 최 씨 살해 후엔 죄책감에 시달려 다리 부상을 핑계로 잠시 혼자 지내기도 했고 소 씨 부부 살해 당시에도 지시만 하고 가담하지 않았다.

지존파가 체포되기 며칠 전 잡일과 요리를 해 줄 사람이 필요하단 명목으로 자신의 여자친구 이경숙이 일하던 주점에 진 빚을 대신 갚아주고 이경숙을 지존파의 일원으로 들인다. 그렇게 이경숙이 조직에 합류한 지 이틀째 되던 날 아침에 찬거리를 사러 트럭을 타고 아지트를 나섰다가 미행하고 있던 경찰과 1.5km 추격전을 벌인 후 조직원들 중 제일 먼저 체포되었다.1995년 11월 2일 대규모 사형집행이 이뤄졌고 명단에 포함되어 일곱 번째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오전 10시 20분에 들어 사형장 입회하였다. 몸은 약간 떨었으나 그래도 비교적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며 들어왔다고 한다. 인정심문 후 신앙고백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사형 집행 된 후, 이하 조직원들과 함께 전원 시신 화장되어 그의 시신 역시 사형수 공동묘지에 묻혀졌다.

지존파 멤버 김현양

金現陽, 검거 당시 나이 22세(1972년 6월 17일생).

행동대장. 중학교 2학년을 중퇴 했고 상해전과 1범이다. 김기환과 조직의 영향을 제일 많이 받은 인물이다. 상해 1범이라는 전과도 조직 가담 후에 생긴 전과다.검거 당시 입대를 앞두고 있던 남동생과 미성년자던 여동생이 있었으며 12세에 중국집을 운영하던 아버지가 간암으로 사망하자 가세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고 소아마비로 몸이 불편했던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식당 일을 시작했다. 외모가 아름다웠던 어머니가 자식들을 방치하고 식당 일을 하면서 알게 된 낯선 남자들이나 아버지의 친구들을 비롯한 여러 남성과 은밀한 만남을 이어나가는 것을 보면서 충격을 받아, 하교 후 귀가하는 것을 꺼릴 정도로 심리적인 방황을 하기 시작했다. 생활기록부의 행동발달사항에는 '무기력하며 학업에 관심이 없음', '주의가 산만하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스스로 찾지 못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김현양의 학창시절 담임 선생님들은 모두 입을 모아 김현양에 대해 말수가 적고 내성적인 학생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학창시절엔 심리적인 방황에도 폭력적인 성향이 보이지 않았고 큰 문제도 없어 눈에 띄지 않는 학생이었다. 결국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사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의 친구와 재혼한다. 이 때부터 어머니에 대한 배신감, 증오심은 커지기만 했고 이는 일종의 여성혐오로 변모하게 되었다.

결국 중학교 2학년 때 어머니와 다툰 후 가출하여 광주로 올라갔는데 첫날부터 걸인들에게 잘못 걸려 앵벌이를 하게 된다. 껌팔이, 절도 등을 하며 도주할 기회만 엿보다 도주에 성공해 서울로 상경한 뒤, 신문팔이부터 시작해서 지역을 옮겨 다니며 정착하지 못한 채 제화점 직공, 술집 웨이터 등을 전전한다. 그러던 중 전기기술을 배워 취직해 몇 년 간 모은 돈으로 트럭을 구입해 굴비 장사를 시작했으나 실패한다. 장사를 접고 운수회사에 취직했지만 취직한 지 얼마 안 되어서 다른 이로부터 김기환을 소개받고 조직에 가담하게 된다. 조직에 합류한 뒤 내재돼있던 강한 폭력성을 드러내며 두목인 김기환과 조직에 대한 충성심을 보였고 행동대장 노릇을 했다. 행동대장답게 모든 범행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으며 체포 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태연히 웃어 보이며 당당하다 못해 충격적인 발언을 서슴없이 내뱉어 모두를 아연실색하게 했다. 오히려 두목인 김기환보다 언론에 훨씬 많이 노출되었는데 그 이유는 마치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으니 무서울 것도 없다는 태도로 일관했기 때문이었고, 이로 인해 지존파 조직원들 중 얼굴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지존파 조직원 중 유일하게 인육을 먹었다고 발언해 충격을 주었다. 인육을 먹은 이유는 "인간이길 포기하려고."

그러나 끔찍한 범행을 자행하면서도 양수리 부근에서 세 번째 피해자 이 씨와 함께 납치된 이 모 씨를 유일하게 살려주며 탈출의 기회를 제공한다. 다만 일부러 탈출의 기회를 만들어 준 것인지, 단순히 이 씨를 너무 믿어서 방심한 것인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김현양이 구치소에 수감된 후 면회를 와 '날 일부러 살려준 거냐'고 묻던 이 씨의 질문에 대한 대답에 따르면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닙니다."라고 말하며 일부러 기회를 준 것이라는 뉘앙스는 아니었으나 신고한 이 씨를 원망하지 않고 자신들이 저지른 범행에 대해 사과했다고 한다. 평소 이 씨에게 호의적으로 대했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나 동생들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고 "사랑하는 여자랑 평범하게 살고 싶은데 그러면 나머지 애들한테 우리 가족이 개죽음 당할 것이다." 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수감생활 중, 가장 먼저 개신교로 개종하고 참회하였으며 전도 생활도 열심히 하였다고 한다. 세례를 받은적도 있다고 한다. 사형집행 몇 달전부터 몸이 안좋아져 병동 입실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어떻게 됐든, 결국 1995년 11월 2일 대규모 사형집행이 이뤄졌고 명단에 포함되어 두목인 김기환 다음으로 사형장에 입회하였다. 몸을 많이 떨고 안절부절 못했다고 한다.인정심문을 받고 사형장 내 에서 마지막 전도를 하고 찬송가를 부른 뒤, 오전 8시 15분에 집행을 시도하였으나 밧줄 한 가닥이 끊기는 바람에 예정보다 늦은 시간인 8시 25분에 형이 집행되었고 10분 뒤 절명하였다고 한다.사형 집행 당일 전까지 그는 장기기증을 하겠다고 약속까지 하고 있었는데 어쩐 일인지, 당일 사형집행 직전에 번복하였다고 한다.사형 집행된 후, 이하 조직원들과 함께 전원 일괄 시신 화장되어 그의 시신 역시 사형수 공동묘지에 묻혀졌다.

지존파 멤버 문상록

文相錄, 검거 당시 나이 23세(1971년생).

고등학교를 중퇴했고 특수절도 등 전과 3범이다. 고등학교 재학 중 친형과 아버지가 사망한 후 고등학교 동창생이었던 강동은과 함께 가출해 막노동판을 전전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재학 당시 생활기록부에 "학습에 흥미가 없고 우발적 행위가 우려되며 자기 억제를 못함."이라는 지적이 있다. 평소 충동조절장애로 의심되는 행동을 보였다.

1991년 입대했지만 같은 해 12월에 의가사 제대를 한 후 술집 웨이터 같은 잡일을 하다가 강동은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출소후 조직에 가담해 첫 피해자였던 최 씨 살해를 제외하곤 모든 범행에 참여했다.15 조직 내에선 조직의 부두목이었던 강동은을 보좌하는 역할이었다. 김기환 다음으로 연장자였지만 서열은 강동은, 김현양 아래였기 때문에 범죄 행위 시 그다지 주도적인 역할은 맡지 못했으나 김현양이나 김기환 못지 않은 잔인한 성향의 소유자로, 범행시 살인 행위 자체나 피해자들의 고통을 즐기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김기환에게 절대적 충성을 보였고 이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인 이 모 씨를 처음부터 끝까지 믿지 못하고 굉장히 못마땅해 했다. '여자는 어머니도 믿지 말라.'고 하던 조직행동강령을 어기며 이 씨를 살려주려 한 김현양과 지속적으로 마찰을 빚고 주먹 다툼까지 벌였다.

1995년 11월 2일 , 대규모 사형집행이 이뤄졌다. 그 역시 집행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고 끝에서 두번째로 즉, 당시 서울구치소에서 집행 된 15명의 사형수 중 14번째로 오후 3시 15분 경에 사형장에 입회하여 인정심문을 받고, 천주교 미사를 마지막으로 집전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교수대 밑으로 사라진 후 10분 후인 3시 25분에 절명했다.문상록의 사형 집행 후, 시신 인수를 가족들이 거부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본인이 가담한 지존파를 검거한 고병천 전 강력 수사반장과 그의 아내가 대신 인계하여 장례를 치루어주었고, 다른 사형수들과 마찬가지로 화장되어 사형수 공동묘지에 묻혔다.

지존파 멤버 강문섭

姜文燮, 검거 당시 나이 20세(1974년생),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맨 나중에 합류한 막내 조직원이고 유일하게 전과가 없었다.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으로 고모 밑에서 자랐다. 양쪽 얼굴에 큰 화상 흉터가 있는데, 이 때문인지 학창시절 늘 침울하고 무기력했으며 주의가 산만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장기 결석으로 제적 당한 후, 서울과 전주를 오가며 술집 웨이터 일 등을 하다가 알게 된 문상록의 소개로 강동은과 인연을 맺게 되었고 '거금을 쥐어주겠다.'던 김기환의 말에 현혹되어 조직에 가담하게 된다. 검거 후 범행 동기가 '자신의 얼굴에 난 화상흉터를 없애기 위한 성형수술 자금 마련'이라고 진술하기도 했다. 조직 내에선 백병옥과 함께 서열 최하위로 범행에 있어서 주도적인 행위는 하지 않고 주로 뒤처리를 담당했다.

1995년 11월 2일 대규모 사형집행 당시 명단에 포함되어 오후 2시 29분에 13번째 순서로 교도관들로 부터 양 팔을 부축받으며 사형장에 입회하였다. 인정심문 후 교도소장과 목사 및 교도관들 등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였고 찬송가를 불렀으며작별 인사 후 오후 2시 52분에 밧줄이 목에 걸쳐진 채로 휘장 속으로 끌려 들어갔고 오후 3시 1분에 절명하였다.사형 집행 된 후 이하 조직원들과 함께 전원 일괄 시신 화장되어 그의 시신 역시 사형수 공동묘지에 묻혀졌다.

지존파 멤버 백병옥

白炳玉, 검거 당시 나이 20세(1974년생), 특수강도 등 2범.

다른 지존파 조직원과는 달리 부모 양쪽이 온전하게 있었으며 부모로부터 사랑 받지 못한 것도 아니나 매우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다. 부모가 품팔이를 하여 겨우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정도였다. 지존파에 가입해 범행을 저지른 이유도 "부모님께 효도하고 싶어서."라고 밝혔다.마지막 공판에 지존파의 부모 중 유일하게 백병옥의 부모만이 참석했는데 허름한 차림을 하고 있었고 여관에 묵을 돈이 없어 대합실에서 잤다고 한다. 그의 부모는 가난을 물려준 자신들을 탓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판사에게 작성한 탄원서는 묻은 눈물로 인해 탄원서 종이가 모두 흐려져 글이 안보일 정도였다고 한다.또한, 그의 친모는 자신의 아들이 사람을 죽이고 그런 짓을 할 애가 아닌데 사람을 잘못 만나게 되어 이런짓을 하였다며 끝까지 판사에게 선처와 용서를 구했으나, 직후 검사의 사형 구형에 백병옥의 어머니는 거의 실신 정도까지 갈 수준이였다고 한다.

본인은 효도하기 위해 범죄를 했다지만 도리어 부모님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차라리 살인이 아닌 절도였다면 그나마 씨알이라도 먹힐 변명이었겠지 어린 시절부터 몸이 약해 초등학교 재학 중 장기 결석으로 이미 학업에 대한 의욕을 잃었고, 초등학교 5학년 때 '몸이 더럽다.'는 이유로 선생님이 발가벗긴 이후 학교가 아예 싫어졌다고 한다. 중학교에 진학한 후에도 장기 결석으로 제적 당해 불량 청소년들과 어울리기 시작했고 절도 및 강도 전과마저 생겼다.

특수강도로 수감되어 있을 때 교도소 동기였던 강동은과 친분을 맺어 출소 후 강동은과 공사장에서 일한다. 천안에서 막노동을 하던 중, 김기환과 함께 범행 모의를 하던 강동은으로부터 일확천금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며 조직 가입을 권유 받아 조직의 일원이 된다. 조직 내에서 맡은 역할은 범죄 대상을 물색하는 것이었다. 막내였기 때문에 서열은 최하위였지만 선배들 못지 않은 잔악함을 보였고 두목인 김기환에게 절대복종했다.

가장 마지막에 붙잡혔다. 같은 막내이자 동갑인 강문섭과 아지트에 끝까지 남아있다가, 멀리서부터 자신들(김기환 소유) 아지트로 무장한 채 추격해오는 경찰들을 본 후, 집 건물 뒤 야산으로 도주하여 대나무 숲에 숨어있다가 몇시간도 안되어 기동대원들한테 잡혔다고 한다. 해당 부분은 같은 막내인 강문섭은 범죄 전과가 없는 것에 비하여, 백병옥은 이미 학창시절부터 특수강도등의 전과가 2건이 있기 때문에인지 본능적으로 짐작 후 도주했던걸로 추정된다.1995년 11월 2일, 대규모 사형집행이 있었고, 이 때 지존파도 사형 집행명단에 포함되었다.

백병옥은 당일 오후 3시 28분 서울 구치소 내에서 사형집행 된 사형수 중에서는 가장 마지막으로 15번째로 사형장에 입회 하였다. 당시 법적으로 나이가 제일 어려서인지 가장 마지막에 사형당했는데, 관계자 인터뷰 당시 말로는 백병옥이 마지막으로 사형장에 입회했을 당시 두려움에 몸을 하두 떨어서 "xx야 (본명을 안 밝힘), 왜 그렇게 떠느냐? 별로 안 걸릴거야. 금방 끝날거야" 라며 "예수님도 사형수였다. 기타 ...(생략)" 라고 말하며 그의 마음을 안정시키려고 했다고 한다.관계자 스스로 짐작한 부분은 이 때, 백병옥이 가장 두려워 하던 것은 수감생활 중 열심히 회개하여 용서를 받고자 신앙심을 갖고 종교활동에 임하였지만 사형 직전, 죽음 후에 본인이 지은 죄에 대하여 정말로 용서를 받을 수 있는가 , 정말로 구원받아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인가 였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백병옥은 유독 말수가 적었는데, 그 역시도 수감생활 중 기독교에 귀의함과 더불어 열심히 많은 재소자들을 전도하였다고 한다.

부소장으로부터 인정심문 받고, 예배를 하였으며 찬송가를 부르고 성경을 읽은 후, 설교받으며 축도로 예배를 마치자마자 머리에 흰 용수가 씌어지고 목에 밧줄이 걸린 후 재빠르게 사형이 집행되었다. 목사를 포함한 교도소 관계자들 일부는 백병옥이 휘장 밑으로 사라질 때까지 찬송가를 끝까지 불렀다고 한다.이하 조직원들과 함께 전원 일괄 시신 화장되어 그의 시신 역시 사형수 공동묘지에 묻혀졌다.이렇게 백병옥을 마지막으로 1995년 11월 2일 사형집행은 마무리 되었고 2년 뒤인 1997년 12월 31일,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마지막 대규모 사형집행이 있기 전까지 서울구치소 사형장에 설치 된 교수대의 발판은 열리지 않았다.이렇게, 현 대한민국 역사상 두번째 마지막 대규모 사형집행이 끝난 것이다.대한민국의 사형 방식은 현 일본의 사형 집행 방식과 완전히 동일하다.

지존파 여자 멤버 이경숙

李京淑, 검거 당시 나이 23세(1971년생).

강동은의 애인이자 절도 전과 1범. 알코올 중독자였던 아버지와 다방을 운영하던 어머니 아래에서 자라났고 모 여중 2학년을 중퇴, 가출했다. 1992년까지 대전에서 일하다가 영광으로 내려와 어느 작은 주점에서 접대부 생활을 시작했고 그러던 중 주점을 찾았던 강동은과 인연을 맺어 연인이 되었다. 강동은이 엄청난 범죄에 연루되어 있단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함구했으며, 인질이었던 이 씨가 탈출하자 강동은이 잡일과 요리를 해줄 여성 조직원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자신이 주점 사장에게 진 빚 1600만원을 대신 갚아주어 풀려난 뒤 여성 조직원으로 합류하게 된다.16 그러나 합류한 지 이틀 만에 검거되었고 직접적으로 살인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것이 확인됨에 따라 징역 3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 받고 1998년 석방되었다. 검거 당시 강동은의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강동은을 비롯한 지존파 일당들이 최종 사형 판결을 받자 믿지 못한다는 표정으로 옆에 있던 관계자에게 정말이냐고 재차 물어보기도 했다.

지존파 멤버 송봉우(송봉은)

이름이 송봉은으로 알려진 이유는 생전에 형의 주민등록증을 빌려 도용했기 때문이다. 사망 당시 나이 18세(1975년생), 전라남도 영광군 출신으로 고등학교를 중퇴한 후 조직에 합류한다. 1993년 7월 초순 밤, 강동은, 백병옥 등과 함께 범행 모의를 하다가 홀로 걸어가던 최미자양을 발견하고 인근의 다리 밑으로 끌고 가 강간한 뒤 함께 있던 강동은, 백병옥도 최 양을 강간하게 된다. 그 후 최 양의 처분을 두고 강동은 등과 함께 고민하다가 강동은이 김기환에게 상황을 보고 하면서 김기환, 김현양 등의 합류 후 살해지시를 받아 살해 과정에 동참하게 된다. 자신의 몹쓸 짓으로 인해 무고한 사람이 살해당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는지 꿈에 귀신이 나온다며 한동안 괴로워 하다가 1993년 8월, 조직의 자금통장에서 300만원을 빼내 도주하던 중 나머지 조직원들에게 붙잡히고 만다. 용서해주겠다며 "단합대회를 하고 개나 잡아먹으러 가자."고 회유하는 조직원들에게 속아 인근 야산으로 유인당해 그 곳에 대기하고 있던 김기환이 태도를 바꾸며 추궁하자 용서를 빌다가 김현양이 벽돌로 머리를 가격해 기절한 뒤 나머지 조직원들에게 곡괭이 등으로 폭행당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시신이 훼손된 채 사망, 불에 태워진 뒤 암매장당한다.

지존파 사형 판결 처벌

이경숙은 가담 이틀 만에 체포되어 살인 행각과는 관련이 없다는 점이 참작되어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 받았고, 나머지 지존파 일당 전원은 1994년 10월 31일 서울지방법원에서 강도살인, 사체유기, 인육섭취37, 사체손괴, 범죄단체 조직 및 가입죄, 특수강간 등이 적용되어 구형대로 사형이 선고되었다. 이후 고등법원, 대법원에서 모두 사형을 선고받고 1995년 11월 2일 두목 김기환을 포함해 조직원 6명에 대한 사형 집행이 신속하게 이루어졌다.보통 기존 대한민국 대통령 임기 중에 벌어진 사건에 대한 사형집행 결정도 최소 2년은 기다려 주는 게 관례임을 생각하면 대단히 이례적인 일인데, 원래 사형수에 대한 형 집행은 그가 무고할 가능성도 감안하고 또한 마음을 정리하고 뒤늦게나마 교화될 기회를 주기 위해 정권이 바뀐 뒤에, 즉 수년 뒤에 이뤄지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 사건은 온보현38이 저지른 강도 살인 행각과 더불어 워낙 사회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준 '예외적인 경우'이며 무고할 가능성도 전혀 없기 때문에 신속하게 사형을 집행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김영삼 정부 시절 저질러진 살인 사건 중에 사형이 집행된 경우는 이 두 사건밖에 없고, 그 유명한 박한상이나 악질 유괴살인범들조차도 사형 선고는 받았을지언정 집행은 피해갔을 정도니 얼마나 사회적 충격이 컸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단, 제보자였던 여성은 본인도 피해자이며 모두 강요 당해 저지른 일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제외되었다. 대한민국 검찰청 측에서는 결정적 제보자인 여인이 처했던 상황을 불가항력적이었던 것으로 인정하여 기소조차 하지 않고 지방으로 피신시켜 집과 직업까지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일종의 신고자 및 증인보호 프로그램으로 볼 수 있다.한동안 영광의 주민들은 자신들이 영광 사람이라는 것을 입 밖에도 내지 못했다고 하며 영광 사람들이 객지에 나가면 살인자와 같은 동네에 산다고 해코지를 많이 당했다고 한다.

지존파 영화 지존

배우 박정민과 이동휘가 지존파 사건을 최초로 영화화하는 한재림 감독 제작 영화 '지존'(가제)의 주인공으로 물망에 올랐다. 박정민과 이동휘가 '지존'의 주인공으로 출연을 제안 받고 검토 중이다. '지존'은 지존파 사건을 극영화화한 최초의 작품이다. 지존파 사건은 1993년부터 1994년까지 7명의 20대가 부유층에 대한 증오를 바탕으로 범죄조직을 결성, 5명을 연쇄 살인한 사건이다.

이들은 납치됐다 탈출한 한 여성의 제보로 전원 검거됐는데, 이 여성의 증언록이 2015년 한 신문사에 연재되며 다시 한 번 충격을 준 바 있다.이번 작품의 시나리오는 생존자 여성의 증언과 인터뷰를 토대로 만든 작품이다. 생존자는 영화가 그려낼 피해자의 고통과 90년대 한국사회에 대한 진지한 접근에 동의해 '지존'의 영화화를 허락했다는 후문이다.

박정민의 소속사 샘컴퍼니 측은 '지존'의 출연에 대해 뉴스1에 "캐스팅 제안을 받고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이동휘의 소속사 화이브라더스 관계자 역시 "캐스팅 제안을 받고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알렸다. 한편 '지존'은 '관상'의 각본을 맡았던 김동혁 감독의 데뷔작이 될 예정이다. 투자 배급사와 제작을 논의 중이다.

지존파 유씨 지존파 피해자 유씨 생존자 지존파 꼬꼬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22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장도연, 장성규, 장항준이 이현이, 장현성, 인피니트 성규에게 이야기를 시작했다.이날 장항준, 장도연, 장성규는 밴드 마스터 박 씨 사망사건, 윤 씨 부부 실종사건에 관해 밝혔다. 공통점은 실종자들이 1994년도 당시 플렉스의 상징이었던 일명 '각 그랜저'를 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살인사건의 피해자가 고병천 강력반장님을 찾아온다. 첫마디가 '저 좀 살려주세요'였다고. 장도연은 "피해자는 20대 유 씨였다. '걔네들은 악마다. 사람들을 납치해서 죽인다'라고 했다"라고 밝혔다. 경찰들은 소설 같은 이야기에 마약까지 의심했을 정도였지만, 피해자는 아직 보도되지 않은 사건도 알고 있었다.

장성규는 "걔들은 돈이 목적이고, '마스칸'이란 조직도 만들었다. 그리스어로 '야망'이란 뜻이다"라고 했다. 조직원은 총 6명으로, 그녀가 직접 본 피해자만 3명이었다고. 장성규, 장도연은 "소총, 도끼 등 온갖 무기들이 아지트에 깔려 있고, 다이너마이트가 설치되어 있다고 했다"라고 밝혔다.고 반장은 전라남도 영광으로 출동한다. 장성규는 "근데 형사들이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는다. 안 믿는 형사들이 많았다. 거기다 이틀 후가 추석 연휴였다"라고 밝혔다. 결국 강력폭력 4반 총 7명만 가게 됐다고. 장성규는 "강력계 어벤져스라고 봐도 될 정도였다고 한다"라고 밝혔다.

7시간 만에 마스칸 아지트에 도착한 강폭 4반. 장트리오는 "마을이 너무 한적했고, 아지트 외관이 너무 예뻤다"라고 밝혔다. 사진을 본 성규는 "진짜 거기냐"라고 놀라기도. 강폭 4반은 잠복근무를 시작했고, 아지트에서 나온 한 남자를 뒤쫓았다. 미행을 눈치챈 남자는 전속력으로 도망쳤고, 강폭 4반은 그 자리에서 검거에 성공한다. 검거된 남자는 부두목으로, 그가 하는 말은 피해자 유 씨 증언과 모두 일치했다.

강폭 4반은 2시간 만에 마스칸을 일망타진했다. 마스칸 사건은 우리가 알고 있는 지존파 살인사건이었다. 지하실엔 쇠창살 감방, 무기고, 소각로가 있었고, 소각로엔 사람 두개골이 있었다고. 장항준은 "지존파가 유명해졌던 건 행동도 행동이지만, 말 때문이기도 했다. '더 죽이고 싶었는데 못 죽여서 한이 된다'였다"라고 밝혔다.

지존파의 타깃은 야타족과 오렌지족. 두목은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쳤던 지강헌을 동경해왔다고. 장트리오는 지존파 행동 강령에 관해 말하며 예행연습도 했다고 밝혔다. 장항준은 "바로 살인 연습을 한다"라고 밝혔다. 장도연은 "1992년 20대 여성을 납치하고 성폭행한다. 그때 지존이 나서서 살해하고, 암매장한다"라고 했다. 장항준은 "버스를 기다리는 여성은 타깃이 아니지 않냐"라고 했고, 장현성은 "아무리 대의명분이 좋아도 이건 말도 안 되는 범죄자일 뿐이다"라고 분노했다.

장도연은 "사건 직후 조직원 하나가 몰래 도망쳤다. 18살이었는데, 나머지 조직원들이 집단폭행해서 살해한다. 암매장하고 개를 잡아먹었다고 한다"라고 밝혔다. 성규가 "아무렇지 않다는 건가?"라고 하자 장성규는 "'우린 그냥 일하고 밥먹는 거다'라는 거였다"라고 밝혔다. 장항준은 "재판장에서 '하루에 개 두 마리 잡은 것에 불과하다'라고 했다.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른 거다"라고 밝혔다.

지존파 멤버 사진

이어 지존파는 아지트를 만든다. 장도연은 "자기들끼린 그 공간을 아방궁이라고 불렀다고 한다"라고 했고, 이를 들은 이야기 친구들은 분노했다. 하지만 동네 주민들은 아무도 몰랐다고. 밖에선 지하실 입구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 입구는 차고에 있었고, 자동차로 입구를 가리고 있었다. 장항준은 "아지트를 완공할 때쯤 예상치 못한 일이 터진다. 두목인 지존이 지인 조카를 성폭행해서 감옥에 갔다"라고 밝혔다. 장현성은 "후안무치한 범죄행위는 어떤 명분으로도 용서할 수 없다"라고 분개했다.

하지만 계획엔 차질이 없었다. 두목이 감옥에서 계속 지령을 내렸기 때문. 지존파는 그랜저를 탄 최초 신고자 유 씨와 밴드 마스터 박 씨를 납치한다. 하지만 그들은 악기를 싣기 위해 중고차를 산 것뿐이었다. 지존파는 유 씨까지 공범으로 만들려고 유 씨 손을 억지로 가져가서 박 씨를 죽인다. 윤 사장 부부 역시 지존파가 타깃으로 삼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지존파는 윤 씨를 죽일 때도 유 씨의 손을 이용한다.

그러다 유 씨를 놓고 조직원들끼리 싸움이 벌어지고, 행동대장 김현양의 머리가 찢어진다. 유 씨는 김현양과 병원에 갔고, 유 씨는 우여곡절 끝에 탈출에 성공해 서울로 간다. 장트리오는 "지존파는 유 씨를 잡기 위해 영광경찰서 앞에서 3일 동안 경찰서를 지켜보다가 아무 일 없으니까 아지트로 돌아갔다"라고 했다. 이후 지존파는 사형을 선고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장트리오와 이야기 친구들은 사건을 듣고 느낀 점들을 말하며 사회에 대해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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