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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희 나이 리즈 남편 조규영 회장 결혼 전부인 이혼 재혼 가족 자녀

by 제로스 2023.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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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 조규영 프로필

조규영 회장 학력 가족관계 경력 결혼 부인 아내 직업 재혼 정윤희 영화배우 탤런트

조규영 기업인

소속

중앙건설(대표이사)

가족

배우자 정윤희, 동생 조승규

학력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경력

2010.04~ 중앙건설 대표이사

~2010.04 중앙건설 회장

탤런트 영화 배우 정윤희 프로필

정윤희 나이 키 학력 고향 몸무게 혈액형 자녀 딸 아들 결혼 남편 직업 조규영 회장

출생: 1954년 6월 4일 (66세), 통영시 영화배우 탤런트

키: 160cm

배우자: 조규영 (1984년–)

영화: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욕망,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자녀: 조윤경

학력: 당감초등학교, 혜화여자고등학교, 혜화여자중학교

출생 1954년 6월 4일 (66세)

대한민국 경상남도 통영시

직업 배우

활동 기간 1970년 ~ 1984년

학력 혜화여자고등학교 졸업

배우자 조규영

자녀 2남 1녀

출생

1954년 6월 4일 (66세)

경상남도 통영군1

본관

나주 정씨

신체

158cm, 48kg

혈액형

O형

시력

1.5

특기

그림

좋아하는 남자

술담배를 적당히 즐기는 남자

싫어하는 남자

치아가 고르지 못한 남자

좋아하는 음식

냉면

싫어하는 음식

돼지고기

좋아하는 꽃

장미

학력

당감초등학교

혜화여자중학교

혜화여자고등학교

가족

배우자 조규영

별명

깜씨

정윤희 데뷔 고향

통영에서 출생하였고 부산에서 성장하였으며 1970년 영화 《욕망》으로 영화배우 첫 데뷔하였고 1973년에는 연극배우 데뷔하였으며 1975년 영화 《욕망》으로 정식 영화배우 데뷔하였다. 유지인, 장미희와 더불어 1970~80년대 여자 배우 트로이카 중 한 명으로 꼽힌다.2 1970~80년대 트로이카 중 정윤희는 김지미에 이어 7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의 미인으로 평가된다. 1984년 결혼한 후 은퇴하였다. 2011년 9월 13일 MBC는 한가위 특집으로 정윤희를 다룬 다큐 《우리가 사랑한 여배우들-카페 정윤희》를 방송했다.

 

탈렌트 배우 정윤희 영화 드라마 광고 출연작 작품활동 필모그래피

영화

1975년 《욕망》

1975년 《청춘극장》

1976년 《목마와 숙녀》

1977년 《고교 얄개》 ... 나두주 역

1977년 《고교 우량아》

1977년 《얄개 행진곡》 ... 나두주 역

1977년 《임진왜란과 계월향》

1978년 《나는 77번 아가씨》

1979년 《도시의 사냥꾼》

1979년 《꽃순이를 아시나요》

1979년 《사랑이 깊어질 때》

1979년 《핏줄》 ... 숙이 역

1979년 《가을비 우산 속에》

1979년 《죽음보다 깊은 잠》

1980년 《내가 버린 여자 2》

1980년 《우요일》

1980년 《최후의 증인》

1981년 《강변 부인》

1981년 《사랑하는 사람아》 ... 서영주 역

1981년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 순이 역

1981년 《아가씨 참으세요》

1981년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 수련 역

1981년 《니르바나의 종》

1982년 《아벤고 공수군단》 ... 배수나 역

1982년 《춘희》

1982년 《여자와 비》

1982년 《진아의 벌레먹은 장미》

1982년 《정부》

1982년 《여자의 함정》 ... 수현 역

1983년 《안개 마을》 ... 수옥 역

1983년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1983년 《약속한 여자》

1983년 《질투》

1983년 《땜장이 아내》

1984년 《동반자》

1984년 《사랑하는 사람아 2》

1984년 《사랑의 찬가》

1985년 《사랑하는 사람아 3》

드라마

1977년 TBC 주말연속극 《청실홍실》

1979년 TBC 일일연속극 《야 곰례야》

1979년 TBC 주말연속극 《고독한 관계》

1980년 TBC 일일연속극 《동녀미사》

1980년 TBC 주말연속극 《축복》

1981년 KBS2 일일연속극 《혼자 사는 여자》

1981년 KBS2 일일연속극 《물망초》

1981년 KBS1 TV문학관 《바우덕이》

1982년 MBC 주말연속극 《고백》

1982년 KBS2 일일연속극 《세 자매》

1982년 KBS1 TV문학관 《산골 나그네》

1982년 KBS1 TV문학관 《어떤 여름방학》

1983년 KBS2 주말연속극 《청춘행진곡》

1984년 KBS1 대하드라마 《독립문》

광고

해태제과 부라보 콘

제일합섬

쥬리아화장품

하이츠가구

대한민국의 여배우로 장미희, 유지인과 더불어 197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 중 한 명으로 이름을 날렸다.다른 트로이카 일원보다도 외모면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1970년대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미녀 배우로도 유명하다. 트로이카 중 가장 아름다운 외모로 당시 많은 남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렇다보니 관능적인 배역을 맡는 일이 많아 반 섹스심벌 정도로 대우하는 일이 흔했다. 남성팬들 사이에서는 유지인과 더불어 '누가 더 미인인가'라는 주제로 설전을 자주 벌이곤 했다.

전성기 시절 상대배우로 출연했던 남자배우들의 인터뷰나 증언을 봐도, 정윤희를 회고할때 '외모가 굉장히 예뻤다'는 언급을 빼놓지 않는다. 한 원로 카메라맨은 ‘여배우는 어디 한 군데쯤은 흠이 있는데 정윤희는 아무데나 갖다 놓아도 화면에 완벽하게 나온다’고 칭찬했다고 한다.1954년생으로 경상남도 충무시에서 태어났다. 유년기에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당감동으로 이사를 가서 그 곳에서 초중고 시절을 보냈다. 혜화여고 시절 정윤희는 외모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정윤희의 어릴 때 꿈은 피아니스트였다. 그래서 고교 졸업 후 친구와 같이 대학 응시를 했다. 그러나 친구는 S대 음대에 붙었지만 정윤희는 떨어졌다고. 그 친구에게 경쟁심을 가진 정윤희는 그 친구의 1년 후배가 되기 싫어 미술로 전공을 바꾸었다. 주로 명동 일대에서 활동하며 서울 말씨를 익혔다고 하는데, 그곳에서 정윤희는 부산 미니스커트충무시 의문의 1패로 불리며 그 일대에서 외모로 유명했다고 한다. 미술을 지망했던 정윤희였지만 당시 생활비가 부족했고, 또 그녀의 외모가 전국구임을 알게 된 정윤희는 배우로 장래희망을 바꾼다.그래서 그녀가 첫번째로 응시한 영화가 1974년 최고 흥행 영화로 유명한 별들의 고향. 그러나 배우 경험이 없던 정윤희였기에 여주인공 심사에서 탈락하게 된다. 별들의 고향은 정윤희 대신 안인숙이 여주인공 자리를 꿰차게 된다.

1975년 영화 욕망으로 데뷔했다. 원래는 1974년에 바보들의 행진의 여주인공으로 캐스팅되어 데뷔할 예정이었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영화 출연이 무산되었다고 한다. 데뷔작인 욕망은 흥행에 실패하며 또 하나의 무명 여배우로 남나 싶었으나.

정윤희는 2번째로 영화 출연 기회를 맞이한다. 김지미, 윤정희가 거쳐 간 청춘극장의 주연으로 출연한 것이다. 원래 신인 여배우 강경희가 맡기로 한 자리였으나 강경희가 박동명 사건6에 연루되어 그 자리에 정윤희가 대신 들어간 것이었다. 비록 청춘극장은 거하게 실패해 버렸지만, 이전의 유명 여배우였던 김지미, 윤정희가 맡았던 배역을 맡았다는 점으로 인해 그녀의 지명도 상승에 어느 정도 기여를 했다. 그리고 동시기에 해태제과의 전속모델이었던 양정화도 박동명 사건에 휘말리며 계약이 파기당했는데 정윤희가 이 해태제과의 모델 자리를 차지하며 그녀의 얼굴이 더욱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질 수 있었다.

박동명 사건으로 인해 얻은 반사혜택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청춘극장으로 대중들에게 주목을 받은 것뿐만이 아니라 당시 거대 방송사였던 동양방송과 전속 계약을 맺어 활약을 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후 정윤희는 동양방송의 인기프로그램인 쇼쇼쇼의 2대 MC를 맡아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이때 당시 더블 MC였는데, 정윤희의 파트너는 동양방송 전속가수였던 위키리(본명 이한필)였다.

그리고 마침내 1977년 장미희와 함께 주연을 맡은 드라마 ‘청실홍실’이 큰 인기를 얻으면서 정윤희는 스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청실홍실에서 정윤희는 부잣집 여대생역을 맡아서 여주인공 장미희와 삼각관계를 이루는데 드라마에 나온 정윤희의 세련된 외모가 주목받으면서 그 해에 가장 예쁜 연예인으로 선정되었다.한편, 영화에서는 얄개 시리즈에서 나두수의 누나인 나두주 역으로 출연하며 우스꽝스런 이미지를 소화한다. 나두수가 나두주의 얼굴에 낙서한 장면이 유명하다.

1978년에는 당시 붐을 이루던 호스티스 소재 영화인 나는 77번 아가씨의 주연을 맡아 정윤희의 벗는 모습을 보고 싶어했던 남자들의 기대감 속에 흥행 성공을 이끌어냈고, 이때부터 여배우 트로이카의 1인으로 영화계에서도 자리를 잡았다. 같은 해, 가수로 데뷔하여 앨범을 내기도 했다.하지만 이 무렵까지만 해도 연기력이 부족하다고 까이기도 종종 까였으며, 그 때문에 ‘말뚝’이라는 굴욕적인 별명이 붙기도 했다. 당시 정윤희가 외모로는 주목받았지만, 연기력으로 주목받던 장미희에게 라이벌 의식을 가졌다고 한다.

1979년에는 유지인과 더불어 영화 실적에서 정점을 찍었다. 그녀는 죽음보다 깊은 잠, 도시의 사냥꾼, 사랑이 깊어질 때, 가을비 우산속에, 우요일, 꽃순이를 아시나요에 출연했고 이 중에서 사랑이 깊어질 때랑 우요일을 제외하고 무려 1년 만에 4편의 영화를 성공시키는 저력을 보여줬다. 이러한 기록은 지금도 보기가 힘들다. 한편, 같은 해인 1979년에 '야, 곰례야' 등 동양방송 드라마들의 주연을 맡아 큰 인기를 끌었다. 여기서 정윤희는 순박한 시골 처녀역을 소화했다.

1980년대에 들어와 MBC로도 출연 범위를 넓히며 드라마에서도 계속 활동을 하는 한편 노출 빈도가 있는 호스티스 소재 영화들부터 ‘사랑하는 사람아’ 같은 멜로물을 오가며 계속 해서 인기 스타로 군림했다. 특히, 1981년에 프리랜서 선언을 하며 동양방송을 이은 KBS에서 MBC로 정윤희가 드라마 출연 범위를 넓힌 일은, 그때까지 공고히 유지되고 있던 방송사 전속 탤런트 제도가 붕괴되는 시초가 되었다.1981년에는 정진우 감독의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에서 자신만의 매력을 영화에 가득 표현해 내는 한편 여우주연상까지 타내며 연기력 면에서도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후 비슷하게 토속적인 주제를 다룬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로 또 다시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1982년에 성공한 영화로는 여자의 함정이 있다. 애마부인 다음으로 흥행한 영화로 알려져 있다. 연속극에서는 코믹연속극 세자매의 막내딸로 출연하여 정동환과 호흡을 맞추었다. 연속극 고백에서는 기존의 연약한 여성상이 아닌 강한 여성상을 보여줬다.드라마에선 발랄한 젊은 여성 역을 맡은 일이 많았으며 CF쪽의 이미지도 이런 드라마쪽 이미지의 연장선상에 있다. 한편 정석적인 최루성 멜로물의 여주인공 역도 자주 맡았다.

한데 영화 쪽에선 남자들의 정복욕을 자극하는 역할이라 해야할지, 미모 자체가 죄가 되어 주변 남자들에게 성적인 대상이 되어 휘둘리며 비극적인 삶을 살게 되는 역을 맡은 일이 많다. 70년대 후반부터는 당시 영화계 분위기가 노출 장면이 빠지지 않던 분위기여서 출연한 영화에서 노출 장면을 보인 일도 자주 있다.

정윤희 남편 직업 조규영 회장 재혼 와이프 전부인 전처 아내 이혼 사유 이유

정윤희 결혼 1984년 중앙건설 조규영 회장과 결혼하면서 은퇴하였다. 조 회장은 유부남이라 불륜인데, 당시 부인이 간통죄로 고소해서 처벌받았다. 그 이후(1984년 12월) 회장이 전 부인과 갈라서고, 정윤희와 재혼했다.

다만 여기에 대해서는 복잡한 사연이 있는데,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검색해 보면 당시 기사들이 나와 있다. 상대 남성은 이미 부인과 불화하여 별거하고 이혼 절차를 밟고 있는 상태라 주장한 것으로 나와 있다. 1983년 4월부터 정윤희를 만나 왔다는 전처의 주장과는 달리, 상대 남성은 같은 해 10월 이후에야 정윤희를 만났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10월은 상대 남성이 부인과 별거한 시점을 말한다. 즉, 결혼 생활 파탄은 정윤희와는 무관하다는 것. 정윤희 또한 같은 해 12월에 상대 남성을 처음 만나 사귀기 시작했다 주장했다.

또한 실제 통정 여부를 확인하기 어렵다는 점도 논란이 되었다. 원래 간통죄는 현장 증거가 있어야 고소가 가능하므로, 전 부인은 정윤희의 집에 자신의 남편이 있는 현장을 사진으로 찍어 증거로 제출하긴 했는데, 둘이 잠옷 차림이긴 했지만, 남녀 단 둘이 있는 현장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가정부, 매니저, 조카, 운전사)도 함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정윤희 측에서는 통정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지금처럼 과학 수사 기법이 도입된 시절도 아니라서 DNA 증거 확보는 불가능했다. 한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가 아닌 다른 언론사에서 서비스한 기사나 블로그 등에 나온 이야기는 또 다르다. 예를 들면 어떤 기사에서는 조용하게 인터뷰에 임했다고 나온 반면, 어떤 기사에서는 기자의 뺨을 올려붙였다고 나온다.

현재 경향신문, 매일경제, 동아일보, 한겨레만 기사 서비스를 하기 때문에 다른 메이저급 언론사 기사는 찾을 수 없는 데다가, 저 시절 기사들의 특성상 사실 확인이 어려운 부분이 많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연예계 기사는 아님 말고식 보도가 더 심했다. 물론 이 경우는 대기업 사장인 정윤희의 현 남편이 언플을 했을 수도 있으나, 정윤희 남편의 전처 또한 대단한 집안의 자녀라서 맞언플을 했다는 주장도 있기 때문. 따라서 위키러들이 알아서 교차 검증을 해서 판단해야 할 것이다.

양육비를 조건으로 위자료를 더욱 많이 받아냈다는 기사 내용과는 달리, 어찌된 일인지 전처네 자녀들을 정윤희가 길렀다. 당시 자녀들의 나이가 1~2세 정도였기 때문에, 사실상 거의 처음부터 정윤희가 다 키웠다. 이 때문에 당시 주부층에서도 정윤희를 동정하는 사람들이 나왔다.결혼과 동시에 연예계를 완전히 떠난듯 했으나, 1993년 남편 회사 중앙산업의 가구 브랜드 '하이츠'의 TV광고 모델로 활동한 적 있다. 이때 전성기에서 10년정도 지났지만 여전히 미모를 자랑한다.

정윤희 아들 사망

2011년 친아들의 약물중독으로 인한 심정지 사망으로 화제가 되어 뉴스에 오르면서 다시 주목받았고, 언론의 추적을 받았다. 집안 사업도 어려워졌는지 서울의 26억 상당의 집이 경매에 붙여지고 현재는 경기도에서 조용히 살고 있다고 한다.

2013년 나이 60이 된 정윤희의 근황이 포착되었다. 다른 배우들과 달리 명품으로 치장하거나 멋을 내는 것과는 달리 수수한 옷차림으로 입고 다닌다고 그런데 결혼 초창기에는 경제 관념이 없어서 막 쓰기만 했다가 시가(媤家) 식구들한테서 혼나기도 했다고 한다.

정윤희 수애 성룡 스캔들

단군 이래 최고의 미녀라는 말도 종종 들었고, 해외에도 유명해서 그녀가 일본에 갔을 때는 일본 영화인 한 사람이 '일본 일류 여배우 100명을 합쳐도 정윤희의 매력엔 못 당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언론에서 수애를 정윤희와 비교하는 기사를 종종 올리고는 한다. 한때는 수애가 정윤희의 딸이라는 루머가 떠돌았다고 한다. 그 외에 박진영이 수지를 보면서 정윤희를 떠올렸다는데.

이런 류의 여배우들이 으레 그렇듯이 활동 당시에 별의 별 소문이 다 떠돌았다. 그중에서 제일 유명한 건 술집 여자설과 중졸설. 고등학교를 안 마치고 술집을 전전하다 연예계로 데뷔했다는 설이다. 정윤희가 술집 여자역을 많이 맡았기에 일어난 해프닝이었다. 그러다 보니 정윤희는 유지인에게 퀸들의 만남 '대중들에게 잊혀지고 싶다'고 하소연했다고. 성룡과도 스캔들이 있었다.

정윤희의 과거 사진을 보면 특이한 점이 하나 있는데, 긴 생머리로 활약한 적이 없다. 이것도 정윤희의 특색이라면 특색. 아무리 길어도 어깨머리가 끝이고 상당 기간을 단발머리로 활동했다. 사실 정윤희가 전성기로 활동한 70년대 후반~80년대 초반에는 여성들 인기 헤어스타일로 펌이 들어간 중단발이 유행이었던 탓도 있다.

정윤희 신성일

신성일은 정윤희에게 따귀를 날린 적이 있다. 임진왜란과 계월향에서 신성일과 연기할 때 한 장면을 촬영하고 다른 장소로 이동하려던 참에 시간이 지체되자, 정윤희는 시간이 늦었으니 다른 곳으로 가겠다고 했다. 그 장면을 못 찍으면 영화사가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 있었고,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제작부장이 정윤희에게 손찌검을 하려 했다. 그러자 신성일이 이를 무마하려고 본인이 나서서 따귀를 때린 것.

정윤희 리즈 과사 과거사진

배우 정윤희에 대한 관심이 쏟아지며 8월 22일 실시간 검색어에 등장했다.1954년생으로 올해 나이 예순 일곱살인 정윤희는 경남 통영 출신으로 1973년 연극배우로 데뷔했으며 1975년 영화 '욕망'으로 정식 영화배우 데뷔했다.

유지인, 장미희와 더불어 1970~80년대 여자 배우 트로이카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또렷한 이목구비와 인형같은 외모로 국내는 물론 일본, 대만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1970~80년대 트로이카 중 정윤희는 김지미에 이어 7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의 미인으로 평가받았다. 1984년 결혼한 후 은퇴했다.

해태제과 전속모델, TBC ‘쇼쇼쇼’MC 등을 맡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77년 드라마 ‘청실홍실’에서 장미희와 함께 주연을 맡아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영화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등으로 1980년과 1981년에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연속 수상했다.

1984년 정윤희는 중앙건설 조규영 대표이사와 결혼하면서 은퇴했다. 당시 조 대표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후 남편의 실패와 막내아들의 사망 등으로 잇단 악재를 겪어야 했다.(정윤희 자녀 2남 1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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