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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로스 2024.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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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 프로필

이완용 사망 나이 국적 종교 본관 자녀 부모 아들 부인 아내

출생: 1858년 7월 17일, 낙생면

사망 날짜/장소: 1926년 2월 12일, 서울특별시 옥인동

본관: 우봉 이씨(족보에서 제거되었다.)

묘지: 익산시 낭산리

부모: 이호석

자녀: 이항구, 이승구

경덕(敬德)

일당(一堂)

출생

1858년 7월 17일

조선 경기도 광주부 낙생면

사망

1926년 2월 11일 (향년 67세)

일본령 조선 경성부 옥인동

국적

조선

→ 대한제국

→ 일본 제국(일본령 조선)

종교

불교4

직업

외교관, 정치가

붕당

급진개화파 (1882 - 1904)

친일파 (1904 - 1926)

배우자

양주 조씨

자녀

장남 이승구5

차남 이항구

손자 이병길6

비고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의 주요 인사

이완용 사망 나이 1926년 2월 11일 (향년 67세).이완용 고향 출생지 조선 경기도 광주부 낙생면.

이완용(李完鎔, 1872년 12월 13일(음력 11월 13일) ~ 1937년 2월 4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대한제국의 황족으로 장조의 5대손이자 고종의 조카뻘되는 인물이었다. 한일 병합 조약 체결시 개본 제국 정부로부터 조선귀족 작위를 받았다. 을사오적 가운데 한 사람이자 친일파의 거두로 알려져 있는 이완용(李完用, 1858년 ~ 1926년)은 동명이인인 다른 사람이며, 본관은 우봉이다.

조선 - 대한제국 - 일제강점기의 관료.친청, 친미, 친러를 거쳐 친일파가 된7 민족 반역자(친일반민족행위자)로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 7조약, 기유각서, 한일병탄조약 체결을 주도하면서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의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매국노의 대명사이다.8 친일반민족행위자 하면 떠오르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서, 국민들로부터 그가 죽은 지 9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꾸준히 친일파 매국노라고 비판받고 있다.

아무리 명석한 사람이라도 돌이킬 수 없는 악행들을 저지르면 어떤 평가를 받는지를 잘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후술하겠지만, 이완용은 주위에서 총명하다는 평을 많이 들었고 판단이 명확했으며 처세술에 능한, 흔히 말하는 '성공가도를 달리는데 최적화된 사람'이었다.9 하지만 그 똑똑한 머리로 매국노 짓을 했으니 두고두고 욕을 먹는 것. 이와 같은 악질적인 친일 행각으로 인하여 국내에서는 친일반민족행위자, 매국노라 하면 바로 이완용이 연상될 정도로 매국노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을 확고히 했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남녀노소 세대고하를 막론하고 을사오적 중 다른 4명의 이름은 몰라도 이완용의 이름만은 대부분 알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누군가를 이완용에 비유하는 것 자체가 쌍욕을 넘어서 모욕으로 통하며10, 이는 서양 국가에서 누군가를 나치, 아돌프 히틀러에 비유하는 것 수준의 모욕이다.이완용과 동시기에 똑같이 매국노 짓을 한 송병준11 같은 경우도 이러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면 생전에 이완용이 얼마나 대표적인 악랄한 매국노였는지를 알 수 있다. 후손들은 국가를 상대로 환수된 재산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제기하는 등 조상과 다를 것 없는 뻔뻔함을 낱낱이 보여주며 국민들을 더욱 분노하게 하고 있다.처세술에 뛰어나고 영민했던 인물이었는데, 미국인 선교사 겸 의사인 호러스 뉴턴 알렌은 후에 이런 평을 남겼다.

이완용? 그는 한마디로 기계 같은 사람이다.한마디로 머리가 잘 돌아가고 영민하지만, 영혼이 없는 것 같은 인물이라는 뜻. 다만 의외로 검소한 습관을 지향했다고 한다. 낭비가 심하기로 유명한 궁중식단12의 병폐를 비판하고 샌드위치를 점심으로 가져왔던 사람이 이완용. 당시 궁중식단의 경우, 거하게 상을 차린 후 윗사람이 다 먹지 못한 음식들은 그대로 아랫사람에게 주었다. 먹다 남긴 거나 먹으라는 의미가 아니라 덕을 나눠준다는 의미였다.13 그래서 반찬을 집을 때에는 결코 남이 먹다 남긴 것처럼 헤집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 다만 그러다 보니 식사시간이 한없이 길어지고, 임금부터 다 먹고 나면 너무 많은 시간이 흐르곤 했다. 그래서 이러한 비효율성을 타파하고 덤으로 음식물 쓰레기도 줄이고자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완용은 생전에 일본어는 한 마디도 할 줄 몰랐다고 한다. 한국인에게 일본어보다 익히기 어려운 영어는 원어민 수준으로 배워 익힌 걸 감안하면 굳이 배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걸로 보인다.14 영어는 처음엔 육영공원에서 배웠지만, 서툴러서 미국에 파견되었을 때는 큰 활약을 못했다. 하지만 오랜 미국 생활로 영어 실력이 일취월장하여, 나중에는 조선총독부 관료들보다 유창하게 구사했다고 한다. 이토 히로부미나 데라우치 마사타케 같은 일본인들과 대화할 때는 영어를 사용하거나 통역사와 함께 다녔으며, 정사를 맡을 때도 이토 히로부미와 같이 영어를 할 줄 아는 일본인과 했다. 여건이 충분함에도 일본어를 배우지 않은데서 알 수 있듯 일본인 인맥을 넓히려 하지도 않아서 그가 공직에 있을때 아는 일본 정치인들은 이토나 데라우치 총독 정도만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사람이 1906년 학부대신15 시기에 공교육의 일본어 시간 도입을 추진하고, 가장 교육시간이 많은 과목으로 만들어 일본에서 "이완용이 아니면 할 수 없었던 일"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행적과 성격과는 관련 없이 서예에 능해 조선 후기의 명필가로 꼽히기도 한다. 그의 필체에 대해 예술의 전당 학예연구사인 이동국 씨는 "이완용은 행서와 초서가 뛰어났다"고 밝힌 바 있으며, 그 동안 공개된 이완용의 필적을 보면 그는 행서를 즐겨 쓴 편이다. 행서는 정자체인 해서와 흘림체인 초서의 중간 서체로 미적인 감각이 뛰어난 우수한 글씨체라 할 수 있다.그의 자서전인 <일당기사(一堂紀事)>에 의하면 경북 김천 직지사의 대웅전 및 천왕문16, 창덕궁 함원전 등에 걸린 현판 10여 종의 글씨를 썼다고 기록했다. 또 독립문 현판의 '獨立門'이라는 글자는 그가 쓴 것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친일파 연구가 정운현은 "필체는 이완용이 아니라 동농 김가진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행적 때문에 글씨의 수준과는 별개로 가격은 바닥을 긴다. 물론 그가 원체 명필이었던 까닭에 가치가 아주 없는 건 아니고, 인사동 같은 곳에서 가끔씩 40~50만 원에 거래가 된다고 한다. 달리 말하면,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지 않았다면 최소 수백만 원에서 천만 원은 했을 글씨라는 말도 된다. 서예는 글씨를 얼마나 잘 썼느냐도 중요하지만, 글쓴이의 인품·평판도 가격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글씨는 그 사람의 성품·평판을 반영한다고 믿기 때문. 실제로 안중근의 글씨가 명필이라고 평가받고 있는 것은 물론 필체 자체가 좋아서도 있지만, 그의 올곧은 성정이 글씨에 남성적이고 당당하게 그대로 묻어났기 때문이다. 괜히 일본 순사들이나 간수들도 글씨 한 점 얻어가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17 안중근의 유묵은 실제로 시장에서 거래될 경우 억대의 가격을 자랑한다. 김구의 글씨도 수천만 원이고, 비교적 덜 유명한 신익희의 작품도 최소 수백만 원의 가격에 거래된다. 그러니 이완용의 40~50만 원은 그야말로 똥값인 셈이다. 같은 원리로 똑같은 역대 조선 임금임에도 성군인 세종대왕의 글씨는 부르는 게 값인 반면 폭군인 연산군의 글씨는 서예로 쳐주지도 않는 수준이다.

검약한 습관이 있었다지만, 그런 습관과는 별개로 자신과 자신 일가의 치부에 상당히 열심이었다.19 민씨 척족 수구파 관료출신인 민영휘가 친일파로 변신하여 일제강점기 동안 가장 재산이 많은 조선인이었고, 이완용이 2번째였다.친일인명사전에서 확인된 바로는 이완용의 재산은 당시 돈 300만원으로,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450억원 가량 된다.20 병탄 이후 벌어들인 돈이 현재 가치로 400억~450억 원이 넘는데, 이는 또한 병탄 전의 자기 일가의 재산에 비해 3배나 늘어난 것이다. 최근 그의 후손들이 땅을 찾는다고 난리법석을 부리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물론 몇몇 개념있는 일부 후손들은 자신의 성을 바꿔가면서까지 이런 땅 찾는 행태에 반대하기도 했다.

게다가 호의호식하던 이완용 일가는 당시에는 굉장한 사치품이던 자동차도 타고 다녔다. 그 시절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고종과 순종에게 아첨을 하기 위해 자신이 타고 다닐 차와 조선 왕실용 어차를 들여왔는데21 고종과 순종과 왕실을 위한 어차로는 캐딜락과 다임러22와 오버랜드23를 들여왔고 데라우치 자신은 위슬리24 차를 타고 다녔으며 그 외에 이완용과 송병준을 포함한 고관대작들도 뷰익이나 포드나 쉐보레 등등의 차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포드나 쉐보레 등은 현재는 그냥 그저 그런 수입차/국내 생산 차량이지만, 이 당시 자동차가 귀할 시절에는 조선 사람들에겐 그림의 떡이요 고급품이었다. 기록 사진으로 당시 고관들이 탔던 고급 자동차들이 덕수궁 석조전 앞에 세워진 장면들도 있다.자동차와 관련해서는 이완용 생전인 1912년에 그의 아들 이항구가 술에 취한 채로 사위 홍운표와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지나가던 어린아이의 다리를 부러지게 해 놓고는 배상은커녕 안하무인격으로 무시하는 바람에 이것이 백성들에게 알려지며 큰 공분을 산 일이 있었다.

사실 이완용은 재산이 물려받은 금액이나 은사금으로 받은 금액은 미미하였고26 거의 대부분이 부동산 투기를 통해 벌어들인 것이었다. 당시 이완용은 경기도와 전라도 일대에 여의도의 7.7배 정도 면적의 땅을 보유했으며(참고), 집을 여러 번 옮긴 부동산 투기의 선구자. 이중 훗날 국가에서 귀속시킨 것이 10,900m2(3천평 남짓)인데, 이는 그의 땅의 0.05% 정도다. 몰수원칙상 그가 받은 은사금과 이자를 고려한 금액만 몰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손들이 소송을 걸어 되찾았고, 이완용의 후손은 그 씨가 어디 가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듯, 소송으로 되찾은 땅을 최대한 빨리 팔아버린 뒤 캐나다로 이민갔다. 땅을 돌려줬다는 이유라는 게 민족정기보다 민사법이 더 앞선다는 논지였다.

대한제국의 근대화를 꾀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정작 대한제국의 근대화 정책이었던 광무개혁 시행 당시 파직되어 고향에서 은거하던 상황이었다.이완용의 평판이 나빴던 탓에 그의 아들 이승구가 26세로 요절하자 이완용이 며느리와 간통해서 그걸 안 아들이 남 보기 부끄럽다고 자살한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해당 내용은 매천야록에 나와있으며 흔히 이 에피소드를 사실로 아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사실은 본래부터 몸이 허약해서 을사늑약 이전인 1905년 음력 7월 병으로 사망한 것.

순종 때인 1908년, 이완용은 조선시대에 간신으로 취급받은 사람들의 복권을 건의하여 받아들여졌다. 그 중에는 윤원형처럼 '간신'도 있지만 붕당정쟁에 휘말려 역적 취급된 소론, 남인, 북인계 인사들도 있었고,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사람들, 여기에 고종을 시해하려 한 사람들, 세조 때의 이징옥, 광해군 때 북인(대북)의 영수로 인조반정 때 처형된 정인홍 등도 있었다. 상당수가 현대에 재평가되고 있는 인물. 순종의 즉위 기념 대사면령의 일환인데, 고종 친정 직후부터 명예회복 운동이 불었으나 최익현 등이 결사 반대했었다. 이후에도 이완용은 박지원, 정약용, 남이 등 그동안 신원받지 못했거나 재야의 명성에 비해 공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인사들을 신원하고 시호를 수여하는 작업을 행했다. 이완용의 이러한 복권 사업은 그가 매국노라서 그동안의 간신들을 복권시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어차피 나라가 망해가니 명목상의 신원이나 해주자는 정리 작업에 가깝다. 일부 노론 음모론자들은 이완용이 친일 노론의 수괴라서 조선에 해악을 끼친 간신들을 복원시켰다고 우기기도 하는데 간신, 역적으로 낙인찍힌 것 말고는 아래 명단에 공통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정작 그 노론에게 당했던 소론, 남인계 등의 인사들도 적지 않다.

이완용 그 명단과 당파 및 기타 설명

좌의정(左議政) 서흥 부원군(西興府院君) 한효순(韓孝純, 대북), 영의정(領議政) 정인홍(鄭仁弘, 대북), 좌의정 목내선(睦來善, 탁남)&, 이조 판서(吏曹判書) 문경공(文敬公) 이현일(李玄逸, 영남 남인), 영의정 문충공(文忠公) 이광좌(李光佐, 소론), 영의정 문정공(文貞公) 조태구(趙泰耉, 소론), 좌의정 문충공(文忠公) 조태억(趙泰億, 소론), 좌의정 충간공(忠簡公) 최석항(崔錫恒, 소론), 좌의정 충정공(忠靖公) 유봉휘(柳鳳輝, 소론), 대사헌(大司憲) 김일경(金一鏡, 소론 준론), 병조 참판(兵曹參判) 김중기(金重器), 회인 현감(懷仁縣監) 김도응(金道應), 예조 참판(禮曹參判) 정후겸(鄭厚謙, 영조 때의 외척), 이조 참판(吏曹參判) 김하재(金夏材, 정조를 모독한 노론), 좌승지(左承旨) 안기영(安驥泳), 우부승지(右副承旨) 권정호(權鼎鎬), 부호군(副護軍) 조중호(趙中鎬), 선천 부사(宣川府使) 김익순(金益淳, 김삿갓의 할아버지), 홍문관 시독(弘文館侍讀) 이희화(李喜和), 우의정(右議政) 민암(閔黯, 남인), 형조 판서(刑曹判書) 이의징(李義徵), 대사헌(大司憲) 한세량(韓世良), 승지(承旨) 신치운(申致雲), 절도사(節度使) 이징옥(李澄玉, 계유정난에 반대한 장군), 사옹원 판관(司饔院判官) 원용성(元用星), 감역(監役) 허욱(許煜), 군부 협판(軍部協辦) 이주회(李周會), 이조 참판 이진유(李眞儒), 승지 정해(鄭楷), 예조 참의(禮曹參議) 서종하(徐宗廈), 이조 참의(吏曹參議) 윤성시(尹聖時), 대사헌 박필몽(朴弼夢,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소론 준론), 대사간(大司諫) 이명의(李明誼, 소론 준론), 형조 판서 이사상(李師尙), 이조 참의 윤연(尹), 훈련 대장(訓練大將) 윤취상(尹就商, 소론 준론), 부제학(副提學) 이명언(李明彦), 보덕(輔德) 김중희(金重熙), 함경 감사(咸鏡監司) 권익관(權益寬), 교리(校理) 윤상백(尹尙白), 지평(持平) 윤지(尹志, 나주 괘서사건의 주모자로 소론), 목사(牧使) 이하징(李夏徵, 소론 준론), 동부승지(同副承旨) 유수원(柳壽垣), 대사헌 심악(沈), 판윤(判尹) 박찬신(朴讚新), 포도 대장(捕盜大將) 조동정(趙東鼎), 교리(校理) 이거원(李巨源), 정언(正言) 이명조(李明祚), 경무사(警務使) 권형진(權瀅鎭), 이조 판서 윤휴(尹鑴, 청남), 영의정 윤원형(尹元衡), 지평 이동양(李東讓), 정언(正言) 이범제(李範濟), 현감(縣監) 이공윤(李公胤), 승지 이중술(李重述), 진사(進士) 이하택(李夏宅), 승지 이보욱(李普昱), 승지 김호(金浩), 현감 박필현(朴弼顯, 소론 준론), 병사(兵使) 박태신(朴泰新), 감역(監役) 정권(鄭權), 부수(副率) 조현빈(趙顯彬), 부사(府使) 심유현(沈維賢), 감사(監司) 권첨(權詹,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노론),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사로(李師魯), 밀풍군(密豊君) 이탄(李垣), 승지 이재화(李在華), 정언 이우화(李宇和), 주서(注書) 권숭(權崇), 이조 참판 김정관(金正觀), 동부승지 김정리(金正履), 감사 정사효(鄭思孝,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소론), 정언 권집(權䌖), 부사(府使) 김주태(金柱泰), 통제사(統制使) 김윤(金潤), 좌부승지(左副承旨) 채동술(蔡東述), 좌의정 박홍구(朴弘耉), 승지 박홍도(朴弘道).

성균관대학교 홈페이지에 역대 총장 명단28에 이완용이 포함되어 있다. 컨트롤 + f키를 이용하여 직접 찾아보자. 참고로, 같은 을사오적인 박제순도 있다. 덕분에 성균관대는 "친일파가 총장한 학교"라고 놀림받는다. 단, 이 당시의 '대사성'의 실질적인 위치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대사성이 당대 성균관을 총괄하던 직책인 것은 맞지만 실질적으로 현재의 총장과 비슷한 급의 인물이었다고 보기 힘들 것 같다. 조선 초기에는 실제로 대사성이 권위를 가진 직책이었으나, 이후 성균관은 정계 진출에 그다지 유리하지 못한 뻘코스 취급을 받고 그에 따라 대사성의 지위도 급격히 추락하였다. 고종 때 와서는 어느 정도 실력만 되면 대사성 직함을 붙여줬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실제 저 페이지로 들어가보면 고종 대의 대사성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고종 재위 기간 15,886일 동안 대사성이 344명이었는데, 이는 1인당 평균 46.18일(1달 반 정도) 재직한 셈이다.억울하게 이완용과의 관계를 오해받은 사람들로는 같은 집안인 것뿐인 역사학자 이병도는 물론이고, 이완용의 고향이 아닌데 고향으로 잘못 알려진 전라도29, 많이 나오지는 않지만 삼성그룹의 창업주 이병철 등이 있다. 가만 있는 이완용을 가지고 입맛에 맞게 조작하다 보니 누구는 특정 지역을 반역의 땅 운운하고, 다른 편 누구는 특정 기업을 깎아내린다.이병도는 이완용의 조카가 아니며, 촌수로는 30촌인데 이 정도면 그냥 남이다. 게다가 '병'자 돌림은 '용'자 돌림과 두 항렬 차이가 나 조카는 절대 될 수 없다.다만, 이것과는 별개로, 이병도는 동정의 여지가 없긴 하다. 일단 자신의 친일 행적도 그렇고, 이완용과 관계가 있음을 부정하기 위해 했던 짓, 예를 들어 박물관에 멀쩡히 전시중이던 이완용의 관뚜껑을 태워없앤다든지30, 이완용을 모 인터뷰에서 익산의 아들(?)로 만들려는 시도는 역사학자라 할 수 없는 저열한 짓이었다.

루머의 마지막 피해자는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다. 이완용의 손자인 이병철이란 사람과 삼성그룹의 이병철은 별개의 인물로, 본관도 다르고, 한자 이름31이 아예 다르다. 이완용 손자 이병철은 작위를 세습한 이항구의 아들이며, 이병철 명예회장은 경주 이씨 판전공파에 진주 향반 출신인 이찬우의 아들인데, 이완용과 어떻게 엮어보려고 이찬우를 이완용의 늦둥이 아들 정도로 끼워맞추려는 사람까지 보인다.

배짱있고 침착한 인간이었다고 한다. 지인과 함께 마당에 나와있는데 갑자기 마른 하늘에 벼락이 떨어져서 나무가 부러지는 사건이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놀라서 지붕 아래로 뛰어가는데 혼자만 태연하게 있으면서 "마른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는 것도 희귀한 일인데 같은 곳에 2번 떨어지는 건 더 드문 일이다" 라고 했다고 한다.이덕일은 "이완용이 노론 최후의 수장으로, 노론 세력을 대표해서 나라를 팔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사실이 아니다. 노론이었으면 위의 인물들을 사면복권 시켜줄 리 없다. 사실 조선 말기부터 외척의 세도 정치가 활성화되면서 붕당정치는 완전히 종말을 고했고, 서인/동인/남인/북인/대북/소북/노론/소론/벽파/시파 따지는 게 의미가 없어졌다. 그마저도 혁파되고 아예 외세에 놀아나게 된 근대화 시기였으니 당연히 사실이 아니다.이완용은 어렸을 당시에 총명했고 똑똑했던 인물이었다고 한다. 애초에 민족을 팔아넘길 정도면 똑똑함을 넘어선 머리인 것이다. 문제는 이런 이완용이 만약 자신의 능력을 우리 민족을 위해 사용했다면 모를까, 민족을 팔아넘기는 짓에 사용했으니 그야말로 곡학아세의 훌륭한 표본이다.

중국에서도 매국노로 유명세를 떨치게 되었다.중화민국 북경 정부 시절인 1921년, 안직전쟁으로 돤치루이의 안휘군벌을 몰락시키며 중국의 패권을 잡은 봉천군벌과 직예군벌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이때 봉천군벌의 수장이던 장쭤린38은 진윈펑 내각의 사퇴 이후 자신과 친한 교통계의 수장인 량스이를 국무총리에 임명,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에서 차관을 끌어들이려고 했다. 이게 당시 말 많던 산동반도의 소유권 문제하고도 연결되어 중국 사람들이 내부에서 반발이 심했다. 거기다 방금 전까지 적이던 돤치루이의 안휘파 인물을 대량으로 사면하기까지 하자 직예군벌의 수장이던 우페이푸는 이를 비난하면서 전보를 보내곤 과거 중국의 여러 매국노와 더불어 이완용을 같이 언급하면서 량스이에 대해 욕을 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량스이는 기회를 틈타 내각을 차지했다. 일본 대표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전일 의논한 것을 뒤집었는데 동경에서 주중국 일본 대사에 훈령한 것을 보면 외교부에 일본 차관을 요구토록 하고 일본이 추천한 사람을 쓰게 했다. 량스이는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고 여론을 고려하지도 않고 있다. 외직 경험도 없는 사람이 제멋대로 일본의 요구를 허락하고 철로를 되찾기 위해 마침내 차관을 일으키고 주미 각 대표가 이에 따르도록 훈령했다. 철로는 일본인 경영으로 귀속토록 하고 수천만 원의 채권을 일으켰다. 역대 내각이 하지 못했던 것을 서슴없이 그가 했다. 지난날 인민들의 통곡이 쌓여 있는데 그걸 무시하고 고집스럽게 일을 저질렀다.국권이 희생되고 운송권이 중단되는 데 어찌 외인을 후대하고 어찌 조국을 원망하지 않겠는가? 량스이는 끼리끼리 무리 짓는 것을 지원하고 조종하며, 외세에 아첨하는 매국으로 이완용, 장방창40이 되었으니 동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남녀노소 전국 인민은 이민족이 우리 강토를 침략하는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으니 간적을 물리치고 정의를 위해 용감히 앞으로 나가자. 모두가 지혜를 모으고 힘을 합쳐야만 한다. 바로 중국 대표에게 급전을 쳐 원래 계획을 밀고 나가도록 하자.

이렇게 전문에서 언급할 정도면 당대 중국인들이나 식자층도 '이완용 = 나라 팔아먹은 사람'이라고 인식했고 그 이름도 유명했다는 이야기.충격적인 사실은 이완용도 배향공신이 되어 최소 5년 간 종묘에 모셔지는 대참사가 실제 일어났다는 것이다. 1928년 5월에 대한제국 시기의 고위 관료와 황실 인사들이 후보 추천과 투표를 거쳐 순종의 배향공신으로 송근수, 김병시, 이경직, 서정순 4인을 정한 후, 순종의 후사였던 황태자 이은에게 보고하고 결재를 받았다.42 그러나 며칠 후 이왕직 장관인 한창수43의 주장에 따라 김병시, 이경직이 보류되고 이완용이 추가되었고44, 배향공신 논의에 참여했던 고위 관료 출신과 황실 인사들이 이에 반발하자 7월에 이왕직은 배향공신의 종묘 배향을 일단 보류했다. 하지만 1940년 3월 11일에 송근수, 12일에 이완용, 13일에 서정순을 종묘에 배향하는 의식을 정식으로 치렀으며45, 이왕직에서 간행한 기록물에 이를 등재했다. 해방 후에 이완용의 신위는 당연히 출향되었고, 김병시, 이경직의 종묘 배향이 정식으로 진행되었는지 여부가 분명하지 않아서 다수 기록물에 순종의 배향공신이 송근수, 서정순 2인만 기재되어 있다.

정식으로 창씨개명한 이름은 리노이에 칸요(李家 完用). 그냥 이(李)씨 가문(家)의 완용(完用)이라는 뜻이다. 한국어로 그대로 읽으면 '리가 완용'이렇게 여러가지 의미로 유명하다보니 다른 동명이인들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었다. 이완용은 나라를 배신하고 팔아먹은 아이콘이며, 이완용이라는 단어는 대한민국 내에서 배신과 매국의 상징이 돼버린 것이다. 다른 매국노들은 몰라도 이완용은 이름만 들어도 '아, 그 매국노?'라고 할 정도로 다른 방향으로 유명해진 사람.동명이인은 물론 이름이 똑같거나 연상이 될 정도로 비슷한 이름이라서 주변으로부터 피해를 당해서 개명신청을 한다면 범죄자라든지 하지 않는 이상 거의 100% 허가해준다고 봐도 되는데, 개명 허가받기 힘들던 2000년도 이전에도 웬만해선 허가해 줄 정도였다.이완용이란 이름 가진 것 하나 때문에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TV로 나올 정도다. # 물론 일부 방송 프로그램에 의하면 이름이 같으니 하도 놀림을 받아 해탈한 것인지 그 누구도 잊을 수 없는 이름이라고 좋은 쪽으로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는 듯 하다.

심지어 컬투쇼 사연 중에는 친구 이름이 이완용, 그것도 한자까지 똑같아 어릴 때부터 고통을 받았고, 옆 반 친구 이름이 하필 이순신이라 둘이 싸우면 선생님이 항상 이순신 편을 들었던 사연도 유명한 일화.동명이인이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나왔는데, 그 이완용 후보는 뒤에서 1등으로 낙선했다.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다른 이완용 후보가 출마했는데, 이 사람도 뒤에서 1등으로 낙선했다.성씨와 이름 모두가 일치하는 경우 뿐만 아니라 이름만 같아도 취급이 좋지 못하는 사례는, 다른 나라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미국의 경우 독립전쟁 당시 영국과 내통하여 반역을 저지른 베네딕트 아놀드와 이름이 같은 동명이인들은 종전 200여 년이 넘은 지금도 까이기도 한다.

한때 서울 종로구 옥인동 19번지에 이완용의 자택이 현재도 존재한다고 알려졌었다. 위의 저택 사진과 얼추 보면 유사하기도 했지만, 얼마 후 사실은 2003년 건축된 이완용과는 전혀 관련 없는 건물임이 밝혀졌다. 다만, 실제 이완용의 자택이 옥인동에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나 해당 건물은 현재 남아있지 않으며, 그 집터에는 옥인교회 · 아름다운재단 · 길담서원 등이 들어서 있다.심지어 죽을 때도 일제에 자신의 재산을 바쳤다. 다른 사안에는 유언을 남기지 않았으나, 재산 문제에만 분명한 유언을 남겨서, 당시 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에게 사회사업 기부금으로 3만원이 전달 되었다고.

아들에게 유언으로 "내가 보니까 앞으로 미국이 득세할 것 같으니 너는 친미가 되거라" 라고 했다는 설이 있었으나, 알고 보니 엔하위키 시기에 벌어진 문서 훼손이 최초 출처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정확히는 4순위 근거를 반영하는 주장과 관련된 토론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는 로그 중 가장 오래된 시기인 2011년 7월 이전에는 해당 어록이 아예 발견되지 않은게 확인되면서 발굴되었고, 그 전 엔 퍼진 게 없던 것이 발견된 것.그 사이에 상당히 퍼진것이 확인되고, 문헌 오염 당한 내용 자체가 화제가 된 경우였던데다, 제도권 언론사 MBC 에서도 그대로 인용하기도 했을 정도.

이완용 가족관계

양아버지 덕안군의 아들로 1887년 휘경원참봉을 지낸 이언용(李彦鎔)이 요절하면서 그가 사후 양자로 지명되었다. 1893년 8월 14일 고종은 은언군의 사손을 택정하라 지시했고, 그가 지명되었다. 양아버지 이재덕은 본가로는 21촌 아저씨뻘이 된다.

이완용 첩 에게서 서자 이해구가 있었지만 이해구와 그 후손들의 행적은 미상이다.

양부 : 덕안군 이재덕(德安君 李載悳, 1852년 3월 18일 ~ 1877년 6월 5일)

양모 : 정부인 달성 서씨(貞夫人 達城徐氏, 1850년 9월 25일 - ?), 서우보(徐佑輔)의 딸

친부 : 이재경(李載經, 1844년 2월 29일 - 1912년), 덕흥대원군의 12대손, 밀산군의 9대손

친모 : 청송 심씨(靑松沈氏, 1838년 6월 4일 - 1887년 12월 15일), 심관지(沈觀之)의 딸.

이완용 결혼 전부인 아내 배우자 와이프 : 문화 류씨(文化柳氏, 1873년 6월 3일 - ?), 류병세(柳炳世)의 딸

아들 : 이해만(李海滿)

서자 : 이해구(李海龜, 1899년 2월 20일 - ?)

이완용 사망 이유 사유 원인 사인

사망 원인은 폐렴. 일제의 주구(走狗)로 활동하며 권력을 얻고 호의호식하던 이완용이었다.독립투사들이 피눈물을 흘리면서 조국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이완용은 단지 '폐렴'의 병세가 악화돼 눈을 감았다.

유퀴주 이완용 붓글씨 역사수집가 박건호

역사 수집가 박건호 씨가 매국노 이완용의 붓글씨를 공개했다.12일 방송된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한 박건호 씨는 자신이 모으고 있는 다양한 역사 자료들을 소개했다. 그 중 눈에 띄는 것은 대표적인 매국노인 이완용의 붓글씨였다.이를 본 MC 유재석은 "저건 보고 싶지 않다. 꼭 봐야하냐? 선생님은 대체 이걸 왜 모았냐?"며 분노를 드러냈다.

이에 박건호 씨는 "물론 나도 모으고 싶은 건 안중근 의사의 글씨였다. 그런데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안중근 의사의 글씨는 경매에 나오면 작은 것도 5억 원에 달한다"며 "반면 이완용의 글씨는 1/100의 가격이다. 비싼 것도 40만 원을 넘지 않는다. 그래서 구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박건호 씨는 "못나고 더럽고, 아픈 역사도 역사다. 나 같은 사람이 모아두지 않으면 결국 없어질 것이다. 예를 들어 안중근 의사의 글과 이완용의 글이 함께 전시 된다면 안중근 의사의 삶이 더 부각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의 긴 흐름에서 보자면 안중근 의사는 승리자고 이완용은 패배자인 것이다. 글씨를 아무리 잘 써도 이완용의 글은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침을 뱉고 싶을 뿐"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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