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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동 나이 프로필 와이프 부인 아내 지경자 결혼 자녀 가족 수지김 윤태식

by 제로스 2023.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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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대 대통령선거 장세동 선전벽보

제13대 국가안전기획부장 안기부 장세동 프로필

서울의봄 장세동 나이 학력 고향 종교 경력

출생

1936년 9월 27일 (84세)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 용정리 상유마을

본관

인동 장씨

남촌(南村)

직업

前 군인, 정치인

복무

대한민국 육군

1960~1984년

재임기간

제13대 국가안전기획부장

1985년 2월 19일 ~ 1987년 5월 25일

배우자

지경자

자녀

슬하 4녀

종교

개신교

학력

성동공업고등학교 (졸업)

육군공병학교 (졸업)

육군기갑학교 (졸업)

육군포병학교 (졸업)

육군보병학교 (졸업)

육군대학교 (졸업)

임관

육군사관학교 (16기)

최종 계급

중장

최종보직

대통령경호실장

주요보직

제3공수특전여단장

출생: 1936년 9월 27일 (84세), 고흥군 도양읍

배우자: 지경자

자녀: 장재훈, 장재혁

학력: 육군사관학교 (1960년), 육군공병학교, 대한민국 육군대학, 육군기계화학교, 육군포병학교, 육군보병학교, 성동공업고등학교

장세동 전 정무직공무원

출생

1936년, 전라남도 고흥

학력

육군사관학교

경력

1985.02~1987.05 제13대 국가안전기획부 부장

1981.07~1985.02 제5대 대통령경호실 실장

1980 제3공수특전여단 여단장

1977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 단장

본관은 인동(仁同)이고 전라남도 고흥 출생이다. 호는 남촌(南村)이다.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를 16기로 졸업하여 군인이 되었고 1960년대 중반 베트남 전쟁 당시 중대장과 감찰관으로 다녀왔으며 공수특전여단, 대통령 경호실, 특수전사령부 등에서 근무하였다. 그뒤 특전사령부 작전참모로 재직 중 12.12 사태 및 5·17 비상계엄에 개입하였다. 이후 3공수특전여단장을 거쳐 제5공화국 출범 이후에는 1980년부터 1985년까지 대통령 경호실장을 거쳐 국가안전기획부장으로 재직하였다.5공청산 때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고 자처하였고 1993년, 1987년의 용팔이 사건이 밝혀지자 스스로 책임을 지고 감옥에 다녀오기도 했다. 1995년 풀려났으나, 그 해의 12.12, 5.18 관련 수사로 체포되어 다시 투옥되었다.

 

서울의봄 전두환 장세동

1997년 12월 석방되었다. 허삼수, 허문도, 허화평, 박희도, 정호용, 노신영 등과 함께 전두환의 최측근 중의 한 사람이었다. 한때 2002년 대선에 출마하기도 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장세동도 세월이 가며 전두환의 말을 듣지 않았고 급기야 전두환은 2002년 대선에 출마한 장세동에 대해 '장세동이도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내 말을 안듣는다' 고 하였다.

대한민국 제5공화국 당시 대통령경호실장, 국가안전기획부장을 역임했다.전두환 정부의 실질적인 2인자로 그전에 박정희 정권에 인사로 대입하면 그 권세와 공작과 신임이 이후락+차지철이라 할 수 있다.수도경비사령부 제30경비단장2으로, 직속상관인 장태완 소장의 명령을 무시하고, 군내 불법 사조직인 하나회의 수장 전두환을 따라 12.12 군사반란에 가담하였다. 장태완이 말한 "반란군 놈의 새끼들", "역적놈의 새끼들" 중 한 명. 게다가 실제로 장태완은 자신의 부하들에게 "(장세동을) 발견 즉시 사살하라"는 명령까지 내리기도 했다.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 용정리 상유마을 출신이다. 장세동은 본적이 경상북도 대구, 즉 그의 아버지는 대구광역시 출신이라는 말도 있지만 근거는 없다. 아마 하나회 회원들 중 대다수가 경상도 출신인지라 오해를 한 듯하다.3 실제로 그의 선산이 녹동에 있으니...4 하지만 그의 본관인 인동은 지금의 구미시와 칠곡군 근방에 있는 지역임을 감안하면 본관과 본적을 헷갈린 모양. 근데 정작 안기부장 시절에 고흥지역 원로들이 자신을 만나려는 것도 거부했다. 단, 당시 원로 방문이라는 게 주로 청탁에 가깝다 보니 이는 처세를 잘 한 것에 가깝다. 청렴하고 유능한 관료라는 평가를 받았던 남덕우 전 경제기획원장도 원로 방문을 거절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성동공업고등학교 졸업 후 1960년 육군사관학교를 16기로 졸업하고 하나회에 가입하였다. 하나회는 PK, TK 등 경상도 출신 군인들이 주축인데 호남 출신인 장세동이 가입한 건 그만큼 장세동이 소위 '난 놈'으로 통했던 셈.월남전에 파병된 장세동은 퀴논 북쪽 24 km 탄광 지역에서 베트콩의 공격을 받고 어깨에 총격을 당하여 중상을 입었지만 견디면서 전투를 계속해서 부대원들의 사기를 올려 결국 적 43명을 사살하고 1개 중대를 전멸시키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후 귀국해서 육군 수도보병사단 30경비대대에서 작전장교로 근무하다가 두 번째로 베트남에 파병을 갔는데 이때 베트남에 와있던 전두환과 인연을 맺게 된다.

귀국 후 전두환이 제1공수특전여단장을 할 때 장세동은 그 밑에서 장교로 근무하는 등 전두환의 심복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 후 육군본부와 대통령경호실 경호관을 거쳐 1977년 대령 시절에 수도경비사령부 제30경비단장으로 부임하는 등 승승장구하였다. 다만, 장세동이 전두환의 힘만으로 군내에서 출세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미 전두환과 인연을 쌓기 전에 베트남전에서 주목받을 정도의 무공을 쌓았기 때문에 귀국 후 군내에서 출세가 보장된 상황이었다. 때문에 장세동의 능력과 자질을 알아본 전두환이 장세동에게 먼저 접근하여 자신의 심복으로 만든 것이라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1979년 12.12 군사반란 때 수경사 제30경비단장으로서 지휘계통을 어기고 하나회 인맥에 의해 신군부에 가담하고 직속 상관인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을 체포하였다. 이 공로로 준장에 승진하며 육군특수전사령부 제3공수특전여단장을 맡게 되었다.

 

1981년, 현역 장군 신분을 유지한 채 제3공수특전여단장에서 대통령경호실장으로 임명되었다. 여느 육군 장성들처럼 육군참모총장을 꿈꾸었던 장세동 개인으로서는 별로 원치 않던 자리였으나 각하가 하라면 해야지 어쩔 수 있겠나 이는 전두환이 허화평 비서실 보좌관과 허삼수 사정수석비서관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다. 이듬해인 1982년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 이후 전두환이 경호실의 위상을 높여 허화평 허삼수를 압박하는 목적으로 장세동을 소장으로 진급시켜주었다.전두환 퇴임 이후 전두환의 심복으로 찍혔기 때문에 같은 신군부 출신인 노태우가 집권한 후에는 전혀 권력을 얻지 못하고 청문회에 불려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하나회 내에서 전두환 파벌과 노태우 파벌이 경쟁하게 되었고, 전두환계인 박희도, 최세창 등이 줄줄이 정리되는 상황 속에서 경호실장과 안기부장을 지낸 장세동은 눈엣가시라고 봐도 무방했다.

장세동 부인 아내 배우자 와이프 지경자 결혼 자녀 딸 아들

“결혼한 건 71년, 제가 35세 때였습니다. 제가 월남에서 돌아오니까 사람들이 안되겠다, 더 이상 늦기 전에 결혼해야 한다며 중신을 서더군요. 그때 우리 집사람과 선을 봤는데, 결혼하자고 했더니 섬마을 선생님으로 갈 생각이라 안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난 그 섬에 가서 새마을 지도자가 되겠다고 했죠. 그 다음에 별 대답을 안하길래 제가 결혼 날짜를 잡았습니다(웃음).”부인 지경자 여사는 47년생으로 그보다 무려 아홉살이나 연하. 당시 중령 승진을 앞두고 있는 촉망받는 청년 장교에게 시집온 그녀는 군인 부인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당시 상관의 부인이었던 이순자 여사를 통해 배웠다고 한다. 이여사는 부하 장교 부인들과 만나면 살림법을 비롯해 마음가짐, 그리고 처신에 이르기까지 여러가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여전히 깍듯한 호칭을 쓰며 이순자 여사에 대해 얘기했다.“이순자 영부인님은 군인의 아내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온몸으로 보여주신 분이었어요. ‘군인의 아내는 다른 사람과는 달라야 한다, 남들 대리석 깔고 사는 거 부러워하지 말고 시멘트 바닥 열심히 닦아 광낼 생각을 해야 한다’며 누구보다 솔선수범하셨죠. 진정 배울 게 많았던 분이었다고 생각해요.”결혼 이듬해인 72년 큰아들 재훈을, 그리고 74년 둘째 재혁을 낳아 슬하에 두 아들을 둔 이 부부는 여느 가족과 마찬가지로 주로 자녀문제로 많이 다퉜다고 한다. 현재 두 자녀는 평탄하게 성장, 미국 유학중이다 라고 밝힌바 있다.

장세동 윤태식 게이트 수지김 피살 사건 수지킴 간첩 조작 사건

사건의 시작은 일반적인 살인 사건이었다. 1987년 1월 돈을 벌기 위해 홍콩으로 나간 윤태식(尹泰植)은 사업자금 문제로 아내 김옥분(金玉分)과 말다툼을 하다가 흥분해 김옥분을 우발적으로 살해한다.피해자는 충북 충주에서 1남 6녀의 가난한 농촌 집안에서 둘째 딸로 태어나 가족의 생계를 위해 서울의 공장을 거쳐 미8군 술집, 일본인 대상 유흥 접객원 등의 거친 일을 하다가 홍콩 남자를 만나 결혼하면서 영국령 홍콩으로 이민을 갔다. 하지만 곧 이혼하고 또 다른 홍콩 남자를 만났지만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그러다 만난 사람이 윤태식이었다. 힘들고 어렵게 살아 온 삶이라 겉이 번지르르한 젊은 남자가 감언이설로 다가서자, 고마운 마음에 덜컥 결혼한 것이 화근이었다. 6세 연하인 윤태식은 자격지심 때문인지 하루가 멀다 하고 폭력을 휘둘렀고, 결국 채 몇 달도 함께 살지 않은 1987년 1월 3일 아내를 살해하고 말았던 것이다.

후일이 두려워진 윤태식은 싱가포르로 날아가 북한 대사관에 망명(월북)을 신청했다. 당연히 북한 대사관은 윤태식을 쫓아냈다. 그리고 찾아간 곳은 미국 대사관이었는데 당연히 여기서도 쫓겨났고 미국 대사관은 한국 대사관에 연락해 '야 이상한 놈 왔다 갔어'라며 귀띔을 해준다. 결국 윤태식은 싱가포르 한국 대사관으로 끌려왔는데 이 때 살인 혐의를 피하기 위해 아내가 간첩이었다는 시나리오를 지어낸다. 왜냐하면 국가보안법 제21조 3항에는 이 법의 죄를 범한 자를 체포할 때 반항 또는 교전상태하에서 부득이한 사유로 살해하거나 자살하게 한 경우에는 체포한 경우에 준하여 상금을 지급할 수 있다는 조항, 즉, 간첩은 죽여도 된다라고 선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Dead or Alive성 조항이 있기 때문이다. 즉, 원칙적으로는 생포해야 하지만 죽여놓고 반항 또는 교전상태였다고 둘러대면 그만인 것. 윤태식은 첩보영화 광이었고 시나리오도 그 첩보영화들을 보고 만들어낸 것이었다.그 시나리오는 "사실 아내는 '수지 김'이라는 북한의 간첩1으로, 빚쟁이들에게 잡혀 있다며 싱가포르로 자신을 불러내 북한 대사관으로 끌고 와 납치하려 했고2 자신은 탈출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한국 정부는 이 말을 믿지 않았지만 진짜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당시, 한국은 전두환 정권 타도로 시끄러웠던 1987년도였고 대한민국 제5공화국 정권은 국민들의 관심을 다른 데로 쏠리게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윤태식의 시나리오를 이용하기로 하고 즉, 사건의 진실을 조직적으로 은폐하고, '살인+자진 월북(시도)' 사건을 '납북' 사건으로 조작하였던 것이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장 장세동의 지휘 아래 사건 조작이 전개되었다. 그렇게 '반공, 반공' 하면서, 정작 진짜 월북하려던 인간은 봐주고 무고한 사람을 억울하게 간첩으로 만드는 아이러니가 벌어진 것이다.살인자와 안기부의 더러운 공모.윤태식은 안기부 해외 공작원들로부터 입국 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철저히 교육받았으며, 실제 입국 할 때의 보도 자료를 보면 기자들의 질문에 "이제야 서울에 온 것 같습니다."라고 울먹이는 어조로 답하고, 심정을 묻자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너무 무서워가지고요 말을 못하겠어요."라는 말을 했다.

장세동 부인 아내 배우자 와이프 사진 지경자

이 때, 물론 홍콩에서는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고 있었다. 시체를 침대 밑에 숨겼는데 당연히 부패되어 냄새가 났고 옆집의 신고를 받은 경찰이 출동하여 시체를 발견했다. 외부의 침입 흔적이나 부부 외 제3자의 족적이나 지문, 모발 등 어떤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고, 집안에서도, 피해자 부부의 행적과 지인에 관한 수사에서도 북한이나 정치, 사상 등과 관련된 그 어떤 자료나 문서,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대공사범(국가안보 관련 사범)'이라는 핑계로 홍콩 경찰의 정당한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인다.한편, 윤태식이 스스로 월북하려던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그 역시 곧바로 대공분실로 끌려가 몽둥이 찜질을 당하며, 결국 모든 사건의 전모와 함께 북한으로 망명하려 했다는 것까지 실토한다. 이 사건을 다룬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윤태식을 직접 패던 안기부 직원이 "이 새끼 이거 완전 개구만?"라고 비아냥거리는 장면으로 나온다. 원래대로라면 이 시점에서 윤태식을 감옥에 보내야 맞겠지만, 그러면 이상하게 비추어질테니 그냥 출국만 막고 방치한다.피해자 김옥분은 억울하게 죽은 것도 모자라서 미인계를 쓴 희대의 여간첩이라고 왜곡 선전되었고 언론들은 안기부의 지시대로 온갖 소설을 휘갈겨댔다. 한국 언론은 ‘여간첩 수지 김’ 이야기를 연일 대서특필했다. 심지어, 당시 방영 중이던 KBS 드라마 <남십자성>은 중간에 ‘수지 김’이라는 여간첩 배역을 만들어 투입하기까지 했다. 물론, 진실이 밝혀진 홍콩에서는 ‘수지 김은 간첩이 아니며, 윤태식에 대한 납치 흔적은 없다’라는 보도가 계속 나왔지만, 인터넷이 없던 시대라서 한국에는 이 사실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피해자 유가족들은 온 가정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간첩의 가족이라며 연좌제로 세상의 멸시를 당했고, 실제로 안기부에 연행되어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다. 여기에서 강도 높은 조사는 강제연행 및 고문, 각종 인권침해를 뜻한다. '간첩의 가족'이기 때문에 보안감찰이라는 명목으로 안기부의 감시가 일상화되었으며, 직장과 학교에 틈만 나면 연락을 취해 행적을 캐물으며 민폐를 끼쳤고, 당연히 그들이 매사에 눈총을 받게 만들었다. 당연히 유가족들은 일상 생활을 누리는 것이 불가능해져 직업을 가지기 어려웠고 결혼 생활도, 학교에 다니기도 힘들었으며 신분을 숨기고 연락을 끊어야 했다. 어머니는 이로 인해 실어증을 얻어 1997년에 사망했고 나머지 형제자매 5명도 고초를 겪었다.KT&G3에 다니던 큰언니는 사건 후에 해고된 뒤, 정신질환자가 된 끝에 그해 겨울에 타지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큰언니의 남편도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1988년 교통사고로 뇌수술을 받고 폐인이 되었다. 오빠도 주위의 비인간적 멸시 속에 술에 의지하다 2000년에 의문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여동생 4명 중 3명은 이혼당했고, 그 자녀들도 간첩의 가족이라며 집단괴롭힘을 당해 자퇴하고 가출, 방황했다. 국가안전기획부와 윤태식은 아내를 죽인 것도 모자라서 그녀의 가족들까지 죽음으로 몰아넣고, 가까운 친척마저 지옥으로 떨어뜨린 것이다.이후에 안기부 직원들과 친분을 맺었는지 윤태식을 감시만 했고 윤태식은 수지김의 죽음과 관련해 구속조치 같은 건 받지도 않은 채, 사기 행각을 일삼다 형사 처벌을 받으면서도 안기부의 묵인과 도움으로 하고 싶은 일을 맘대로 하면서 살고 있었다.

윤태식은 자금을 마련해 영화 배급 사업에 손을 댔다가 쫄딱 망한 뒤, 본인 회사의 직원들이나 주변 여자들을 통해 얻은 회사원 20명 등의 신분증, 재직증명서를 위조해 신용카드 수십장을 발급받아 5개월 동안 수억원을 사용해오다 94년부터 2년6개월간 복역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밖에도 중국산 위폐개수기를 자신이 개발한 것처럼 속여 금융기관에 납품될 제품의 공급권을 주겠다며 돈을 빌려 가로채거나 중국 푸동지구에 건설 사업을 따게 해주겠다고 했다가 흐지부지되어 사기 혐의를 받는 등 사기 행각을 지속해왔다. 적발되어도 다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며 재기했다. 96년 7월 출소한 윤태식은 교도소 수감 시절 알게된 교도소 동료로부터 지문인식 관련 사업을 하는 회사를 소개받아 동업을 하게 된다. 또한 윤태식은 이 동료로부터 모 언론사 사장 부부를 소개받아 이들을 끌어들여 이전 동업자와 결별하고 98년 새롭게 ‘패스21’이라는 벤처 기업을 만든다. 패스21의 초기 자본은 이들 부부 중 웨딩,가구 관련 사업을 하던 부인이 대부분 투자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들의 두 아들 역시 패스21의 감사와 이사를 지내는 등 이들은 패스21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한다. 또한 윤태식은 위에서 언급된 교도소 동료로부터 역시 김모 전 국회의원을 소개받았으며 김 전 의원을 통해 정관계 로비를 진행한다.

오랜 기자 생활로 정관계에 발이 넒었으며 언론사 사장이던 김모 사장과 전 국회의원의 비호를 통해 윤태식의 패스21은 재경부 장관을 지낸 인사를 대표이사로 영입하기도 했으며, 정통부 장관은 물론 김대중 대통령에게도 기술 설명을 하는 등 승승장구한다. 이러한 로비와 더불어 90년대 후반 불어닥쳤던 벤처 열풍으로 인해 패스21의 장외 주식은 15만원에서 30만원 사이를 오르내리며 윤태식은 장부상 수백억 원 대의 부자가 된다. 심지어 김모 사장이 고교동창인 이종찬 당시 국정원장에게 부탁해 윤태식은 국정원 내에서 기술시연회를 열기도 했다.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라고, 아무리 봐도 내세울 게 없던 윤태식이 갑작스럽게 벤처 사업가로 잘 나가는 것을 보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2000년 주간동아에서 이정훈 기자가 처음으로 이에 대한 의혹을 제기했다.6 또한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도 이를 자세히 취재하여 방송했다.7수지 김의 유족들은 간첩 누명 자체는 정권 차원에서 조작된 거니 당장 어찌할 수 없다고 쳐도, 최소한 윤태식의 살인행위만큼은 사전에 알고 있었으니 감옥으로 보내졌을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방송 등을 통해 윤태식이 여전히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것을 알게 된 유족들이 분노해 검찰에 수사 요청을 하지만 경찰의 수사는 지지부진했고, 현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인 전해철이 유족들의 법률대리인을 맡아 노력한 끝에 그 과정에 안기부의 압력과 방해 공작이 있다는 의혹 등 모든 진실이 결국 까발려지게 된다.

이 때 국정원과 윤태식, 그리고 정치권의 커넥션이 폭로되었다. 국정원은 윤태식을 철저하게 입단속시켰으며 1991년부터 윤태식의 출국을 금지하고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었고, 윤태식도 이를 이용해 잘 먹고 잘 살았을 뿐 아니라 벤처열풍을 틈 타 패스 주식을 여러 국회의원들, 그리고 언론 각계 인사들에게 뿌려대며 로비를 하고 있었다는 게 밝혀지면서8 벤처 3대 게이트에 번외로 들어가기도 하는 '윤태식 게이트'라는 헬게이트를 소환한다. 이 때 정치권은 물론 사회 전체적으로 엄청난 파장이 일어났다.이후 공소시효 만료를 50일 남겨두고 간신히 윤태식을 구속한 검찰은 홍콩 경찰들에게서 받은9 수사자료를 토대로 윤태식이 살인범이자 사기꾼이며 여기에 국가 기관이 개입되어 있었다는 것을 밝혀낸다.10 그러나 이 사건에 관여한 공직자들은 한 집안 사람들 모두의 인생을 망쳐놓고도 공소시효가 매우 짧은 현행법 때문에 처벌은커녕 재판조차 받지 않았고 분노한 유족들은 국가와 윤태식, 그리고 장세동을 비롯한 과거 국정원 고위관계자들에게 손해배상소송을 걸었다.

법원은 죄질이 너무 나쁜 데다 반성도 안 하고 있으니 중형을 받아 마땅하다며 윤태식에게 살인죄로 12년. 기타 비리로 징역 3년 6개월 등 징역 15년 6개월을 선고12했으며 국가가 유족들에게 42억원의 배상금을 지급하라고 명했다. 이 배상금 액수는 당시 정부가 배상한 손해배상 사건 중에서 유례가 드물 정도로 큰 금액이다. 그리고 국가도 장세동을 비롯한 안기부 간부들과 윤태식에게 구상권을 행사했고 결국 대법원은 장세동에게 9억, 윤태식에게 4억 5천을 배상하라고 판결하였다. 그러나 윤태식의 재산은 이미 공중분해되었고, 장세동은 이미 시가 8억원대의 빌라를 처분하는 등 재산을 빼돌린 뒤였다. 현재까지도 아직 남은 구상금 6억여원을 내지 않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수지 김 사건은 단순한 실수’라는 등 반성보다는 합리화하기에 바쁘다. 장세동 재산, 없나? 숨겼나? 물론 이 돈을 다 받았다 해도 유족들이 그동안 받아온 모욕과 고통이 위로될 리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제대로 받지도 못했다.

국정원은 이 사건으로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를 지나면서 좀 나아졌나 싶었던 국정원에 대한 인식이 엄청나게 나빠졌을 뿐 아니라 해결해온 사건들도 조작 아니냐며 의심받는 등 궁지로 몰렸다. 특히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음모론은 수지김 사건의 진실이 밝혀진 직후 절정에 달했다. 그 정도로 국정원의 신뢰는 바닥을 기었다. 2003년 결국 국정원은 진실을 인정하고 공식 사과를 했지만 이미 신뢰를 잃어버린 뒤였다.또한 국가가 개입해서 부당하게 개인은 물론이고 그 주변인들의 인생까지 망쳐놓았음에도 불구하고, 공소시효가 고작 1~3년 정도밖에 안 되어 관련자 대부분을 형사기소하지 못해서, 국가가 저지른 반(反)인륜적 범죄에는 시효를 줘서는 안 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지만 실현되지는 못했다.

또한 사건 이후 한국과 중국 등에서 사업을 벌여온 윤태식은 벤처기업 '패스21'의 소유주가 된 후 주가조작 및 가장납입 등을 통해 수십 억 원의 부당이익을 챙긴 뒤 이 돈으로 정치권을 상대로 로비를 벌인 사실도 밝혀졌다. 윤태식은 2003년 징역 15년 6월의 확정판결을 받았다.이날 언급된 장세동은 육군사관학교를 16기로 졸업하여 군인이 되었고 1960년대 중반 베트남 전쟁 당시 중대장과 감찰관으로 다녀왔으며 공수특전여단, 대통령 경호실, 특수전사령부 등에서 근무했다.

그뒤 특전사령부 작전참모로 재직 중 12.12 사태 및 5·17 비상계엄에 개입하였다. 이후 3공수특전여단장을 거쳐 제5공화국 출범 이후에는 1980년부터 1985년까지 대통령 경호실장을 거쳐 국가안전기획부장으로 재직했다.

5공청산 때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고 자처하였고 1993년, 1987년의 용팔이 사건이 밝혀지자 스스로 책임을 지고 감옥에 다녀오기도 했다.

1995년 풀려났으나, 그 해의 12.12, 5.18 관련 수사로 체포되어 다시 투옥되었고, 1997년 12월 석방되었다. 허삼수, 허문도, 허화평, 박희도, 정호용, 노신영 등과 함께 전두환의 최측근 중의 한 사람이었다.

1980년대 5공청문회 때 노무현 당시 통일민주당 의원 의 집요한 질문에 '기억이 안 난다'고 모르쇠로 일관하여,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라는 운동권의 비판과 함께 한편으론 신군부 최고의 충신이라는 평도 들었다.

그는 5공 청문회장에서 "사나이는 자신을 알아준 사람을 위해 죽는 법이다", "차라리 내가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죽는 한이 있어도 각하가 구속되는 것은 막겠다"고 하여 화제를 불러모으기도 했다.장세동에 대해서는 의리와 충성스런 인물로 평가를 받았었지만 국민들에게 비판을 받기도 했다.

윤태식 근황

윤태식의 최종 형량은 15년 6개월로, 2001년 10월 구속기소 이후 2017년 4월 27일 만기출소했다. 출소 후 Yoonam(윤엠)/ 이라는 보안 업체를 설립했다. 윤엠은 블록체인 기반으로 보안, 인증 관련 사업을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장세동 근황

장 씨는 지난 2014년 허화평, 허삼수, 정호용 등 쿠데타 주동자들과 함께 군인연금 관련 소송을 냈다가 패소하기도 했다. 국방부는 '내란죄와 군형법상 반란죄를 범해 금고 이상의 형을 받은 경우에는 연금을 지급하지 않는다'는 군인연금법 제33조 제2항에 따라 군인연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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