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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원인 마지막 생존자 동영상 시간 위치 자리

by 제로스 2023. 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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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 부실공사, 불법 구조변경

위치: 서울특별시 서초동

재산 피해: 약 2700억원

날짜: 1995년 6월 29일

시간: 오후 5시 57분 (KST)

최초 보고자: 서울서초소방서

발생일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7분

사고일로부터 +9099일

발생 위치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중앙로 188 (서초동)

現 아크로비스타 부지

북위 37° 29′ 53″

동경 127° 00′ 46″

유형

붕괴

원인

부실공사 및 부실관리

인명피해

사망

502명

실종

6명1

부상

937명

재산 피해

약 2,700억 원

동원

인원

약 68,600명

장비

크레인, 덤프트럭 등 약 2,400대

1995년 6월 29일 목요일 오후 5시 57분에 발생한 대규모 건축물 붕괴 사고. 서울의 삼풍백화점이 붕괴하여 사상자 약 1500명이 발생하였다. 세계 건물 붕괴 관련 참사 중 사망자가 10번째로 많은 참사로 기록되었다. 대한민국에서 6.25 전쟁을 제외하고 건국 이래 가장 큰 인명 피해를 안긴 사고이다.

원인이 비리와 갑질로 얼룩진 부실공사로 밝혀지자 성수대교 붕괴사고와 함께 안전불감증의 대표적 사례로 거론되었고, 전국적인 건축물 안전실태 조사와 건축법의 강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사회적으로 매우 큰 충격을 주어 많은 작품들에서 소재로 삼기도 했다.

해당 백화점의 운영법인은 삼풍건설산업이며, 창업주 이준 회장은 1960년대, 중앙정보부의 인맥으로 강남 서초구의 군용지를 불하받았다. 이 땅은 1970~80년대 강남 개발 열풍에 급격히 발전하고 이준은 그동안 건설로 많은 돈을 벌었다. 이때 지은 건축물 중 하나가 바로 그 유명한 여의도순복음교회이다. 이준은 그동안 모은 자금을 바탕으로 1980년대 후반 서초구 외인주택단지를 철거한 부지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인 삼풍아파트를 건설하고 아파트 단지 내 근린상업지구 개념으로 삼풍백화점도 함께 건설하게 된다.35 하지만 후술하다시피 단순 근린상업지구라고 하기에는 그 규모가 매우 컸다.

삼풍백화점은 1987년 5월 착공하여 1989년 12월 개장했는데 당시 전국 2위 규모 단일매장이었다. 하얀색 바탕의 기존 백화점 건물 디자인을 탈피하여 외형 색상을 분홍색으로 채택했고 콘크리트와 유리가 조화되어 당시에는 엄청나게 파격적인 디자인이었다. 게다가 초호화 쇼핑몰 컨셉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삼풍백화점은 지금 기준으로도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각종 명품 브랜드들을 대거 입점시켜 1980년대 신흥 부촌으로 떠오르던 강남구, 서초구 지역 고객들을 쓸어모았다. 현재의 갤러리아백화점 명품관조차 당시의 삼풍백화점에 비하면 명함도 못 내밀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압구정동의 현대백화점 본점, 대치동의 그랜드백화점 강남본점15과 함께 강남지역 3대 고급백화점으로 손꼽히는 백화점이었다.

심지어 당시 삼풍백화점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강남 한복판의 핵심 지역이었다. 위치 자체가 경부고속도로 반포IC가 매우 가까웠고, 2호선, 3호선17의 환승역인 교대역과 가까웠을 뿐더러, 1993년 3기 지하철의 9호선 사평역 예정지 1블럭 거리라는 네임드급 입지를 자랑했다.18 게다가 근교 강남에 (현재 신분당선 3단계의 전신인) 11호선 강남 구간까지도 예정된 핵심의 핵심이었다.

삼풍백화점은 이런 어마어마한 매장을 바탕으로 공격적으로 마케팅했다. 중앙홀 4층에 있던 아트홀은 서울 시내 유명 공연장으로 이름을 떨쳤고, MBC라디오 공개방송 등 다양한 행사를 정기적으로 개최했다. 또 인테리어 또한 당시로서는 고급스러웠었다. 또 수입품과 사치품을 많이 판매했는데, 이 때문에 언론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 유명한 페라가모를 직수입해 판매하기도 했으며, 이외에도 다양한 직수입 브랜드들을 들여왔다. 물론 이 브랜드들은 붕괴 이후 국내를 떠난 경우가 많다.

또 B동에 수영장 같은 문화공간을 만들어 손님들을 끌어모으는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영국 문화전과 이태리 문화전 같은 행사를 통해 해외 문화 및 브랜드들을 소개하는 이벤트를 열기도 했다. 붕괴 당시에는 프랑스 문화전을 준비 중이기도 했다. 그리고 94년에는 탤런트 최명길을 모델로 대대적인 광고에 나섰고 영국에서 욕실용품 브랜드인 넥타, 이태리에서 의류 브랜드인 마리나리날디 를 직수입해 별도의 매장을 직접 운영하는 사업을 시작했으며, 생활용품 전문점인 아프레미디를 자체 런칭해 백화점과 압구정동에 매장을 열기도 했다. 물론 백화점 붕괴이후, 마리나리날디 대리점 사업과 아프레미디사업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나마 '넥타'는 이후 다른 업체를 통해 매장운영을 재개했지만, 국내 매출부진으로 철수했다.

당시 층별 구성을 보면, 1층에는 로비와 수입품 매장, 화장품 매장이 있었는데, 삼풍이 당시 수입 브랜드 유치에 의욕적이었던지라 일반인들은 이름도 못 들어봤을 브랜드들로 가득했다고 한다. 당시 입점했던 화장품 브랜드들 중에는 디올, 샤넬 등 명품 화장품 브랜드 부터 해서 MAC, 랑콤 등 지금 기준으로도 고급인 브랜드들이 많았는데, 다시 말하지만 90년대 초반의 일이다. 로비는 많은 사람들이 중앙홀이라고 불리던 공간에 있었는데, 정문 쪽에는 분수대와 연결통로가 있었고 후문 쪽에는 행사 매장과 지하로 연결되는 에스컬레이터가 위치해있었다고 한다. 또 중앙홀을 전망할 수 있는 유리관이 설치된 전망엘리베이터 8개도 있었다.

2층에는 여성복 매장이 있었는데 비싼 고급 디자이너 브랜드들과 메이저급 브랜드만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이름 날리던 디자이너들은 웬만하면 이곳에 매장을 내었다고 한다. 3층은 남성복과 캐주얼, 스포츠 전문점이 있었는데, 이쪽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게스나 베네통만 입어도 잘 산다던 때에 구찌, 버버리, 페레가모, 베르사체, 막스마라 등의 수입 명품 브랜드들이 대거 입점해서 '사치 1번지'라는 오명을 쓸 정도였다. 4층 가정용품 매장은 온갖 수입 가구와 장식품, 가전제품을 팔았으며, 심지어는 쓰레기통이나 수세미까지 비싼 수입품을 판매했다고 한다. 완구매장에는 레고 같은 요즘 기준으로도 만만치 않은 완구들을 판매했다고 한다.

5층에는 고급 식당들이 즐비했는데, 당시 방문해 본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콩나물국밥집(춘원)이 유명했다고 한다. 당시 이태리 음식점(빌라파가니니)에서 근무했던 사람에 따르면, 인기 연예인이나 아나운서들도 자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지하 식품관도 비싼 식품들을 많이 팔았는데, 지하 빵집에서는 프랑스산 고급 버터와 같은 수입 홈베이킹 재료들까지 판매했었고, 나머지 음식들도 수입품이거나 대단히 비쌌다. 당시 국내에서 고급식품에 관심하는 사람이 적었음을 고려하면, 부유층이 많이 다녔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물론 B동쪽 슈퍼마켓은 논외다. 지하에는 웬디스 햄버거 매장과 올리브 베이커리가 유명했다고 한다. 또한 여성고객이 많이 몰리던 1층,2층37,5층38에는 고급 커피숍을 배치해 당시에는 드물었던 블루베리 치즈케이크 같은 각종 고급 디저트류도 취급했었다. 해마다 해외 명품을 집중적으로 판매하기도 했는데, 94년 이태리 대전이란 이벤트를 진행하면서 건물 중앙에 고급 스포츠카 부가티 EB110를 전시하기도 했다. B동(레포츠동)은 '전생활관'이라는 개념으로 각종 레저시설 및 문화시설,편의시설이 위치했었다. 1~2층은 금융동을 비롯해 우체국,여행사 등이 있었고, 일반상가도 있었다. 3층에는 갤러리와 문화교실, 4~5층은 고급 스포츠센터인 '삼풍스포츠맥스'가 있었다.

 

 

삼풍은 당시 대중적인 이미지였던 뉴코아를 제외하면 서초동에서 거의 유일한 고급 백화점이었기 때문에 주변에 거주하던 부자들은 자주 들르는 장소였다. 당시 스포츠센터 회원 은 백화점 회원으로 자동 등록할 수 있었는데, 붕괴 이후 스포츠센터 회원 명단을 보니, 이름 대면 누구나 알 만한 고위층들의 이름이 대거 포함되었다고 한다. 당시에 서초동 거주민들을 제외하고도 인근의 압구정동이나 송파쪽에서도 고객들이 상당히 많았다. 이 때문에 백화점 맞은편의 삼풍주유소가 전국 최고 매출을 달성하기도 했다고 한다. 어쨋든 당시 삼풍이 이렇게 고가상품들을 많이 팔았던것은 수요가 충분히 존재했기 때문이다.이런 영업으로 삼풍백화점의 매출 규모는 무섭게 성장했는데, 1991년 개점 2년만에 두배 넘는 성장률을 기록했고 1994년에는 전국 백화점들 중 매출규모 7위권을 기록했다.

여담으로, 현재 유튜브에서 '밀라논나'로 활동하고 있는 장명숙씨가 이곳의 해외명품담당 고문이었다. 장명숙씨는 삼풍백화점 명품브랜드 구성 자문은 물론, 직접 기획부터 바잉작업,직영 브랜드 영업까지 참여했다고 한다. 붕괴된 날이 자신이 출근하는 날이 아니었기때문에 사고는 다행히 피했지만, 자신의 비서와 대학동기가 사망하는 등 주변사람들이 많이 피해를 많이 당했고, 본인에게도 상당한 트라우마를 남긴 사건이라고 한다.

93년 경부터는 B동옆 주차장 부지에 빌딩을 건설해 삼풍그룹 본사 건물 겸 저층부 백화점 건물을 추가로 지어서 백화점을 더 확장시킬 계획도 있었지만, 예정대로 추진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실제로 주차장 부지에 건물을 짓기 위해 터파기 공사까지 진행한 정황이 발견되었고,주차장 부지 밑에는 불법건축물이 존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다만, 이러한 고급화 전략과 단일매장 전략 때문에 타 백화점보다는 매출이 부진했고 유동인구를 제대로 흡수하지는 못했다고 한다.원래는 수도권과 지방에도 지점을 추가로 내려고 했으나, 사업 과정에서 난관이 많아서 착수 기한을 미룬 상태였다. 물론 이용객을 타 백화점과 비교했을 때 그렇다는 것이지, 파리 날리는 백화점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당시에 돗대기 시장마냥 사람들이 몰려든 롯데나 뉴코아랑 비교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백화점에서 세일이나 경품 행사를 하면 주변 교통이 마비되던 시절이다. 교통 문제 때문에 세일 행사를 할 때는 대중교통 이용 권장 문구를 광고에 넣도록 하고, 지하철 승차권을 나누어주는 행사를 했어야 할 정도.

이렇게 외관이 크고 파격적인 강남 고급백화점인 삼풍백화점은 사실 최악의 부실건물이었다. 붕괴 이후 외국의 건축 전문가들은 이따위로 지어놓고도 5년 반이나 버텼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원래대로라면 1년 안에 무너져도 결코 놀랄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 후술할 무량판 구조 공법의 강점 때문에 그나마 버틴 것이라는 분석이 나올 정도였다.

1995년 9월에 A동의 잔해가 먼저 철거되었으며 B동은 3년 넘게 남아 있다가 결국 안전진단에서 위험성이 대두되자 입점업체들을 내보냈고, 1998년 10월 경에 철거가 시작된 뒤 1999년 1월 완전히 철거되었다.

삼풍백화점 인근의 서초동은 강남 지역에서도 손꼽히는 부촌 중 한 곳이라 고급 아파트에 대한 수요가 매우 높긴 했지만, 워낙 악명 높았던 최악의 참사가 일어났던 곳인 만큼 매각이 잘 되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1996년 11월 미원그룹 계열 미원건설(현 동서건설)이 서울특별시청의 부지 매각 공개입찰에서 2만 2700여 ㎡ (6870여 평)의 해당 부지를 2052억 4300만 원에 낙찰받아 1999년 8월에 낙찰가 및 지연금을 모두 완납하여 최종 인수했다. 이후 시공사로 대림산업을 선정해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가 2004년에 아크로비스타라는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삼풍백화점 참사 위령비는 사고가 일어난 장소에 지으려 했으나 참사가 일어난 곳이라는걸 알면 땅값이 떨어진다는 반발로 인해 무산되었다.

삼풍백화점 참사 위령비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긴 한데, 그 장소가 엉뚱하게도 사고가 일어났던 위치가 아닌 양재시민의 숲이라 그런 것이다. 위령비가 사고 현장에 세워지지 않은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더군다나 먼저 지어진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위령비에 밀려 한쪽 구석에 처박혀 있다.1999년 10월에는 삼풍 사고때 아내와 아들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40대 남성이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이 위령비 옆에 있는 나무에서 목을 매어 자살하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뉴스보도 위령비 근처에는 자그마한 정자도 하나 있는데, 주로 인근 aT센터에 있는 서울 코믹월드 때 쉬는 장소로 자주 쓰인다.

서초동에서도 요지 중의 요지인 삼풍백화점 터가 아크로비스타의 착공 전까지 5년이 훨씬 넘도록 어떠한 건물도 들어섬이 없이 거의 폐허와 같이 방치된 것은 단순히 참사의 이유로 매각을 꺼린 상황에서 비롯된 게 아닌 것이 이미 사고 1년 뒤에 경매에서 대상그룹이 낙찰을 받았기 때문으로, 대상그룹이 부지 경매에서 낙찰받고 금액납부를 3년씩이나 지연해서 공사가 늦춰진 것이다. 대상그룹이 미원 등으로 식품산업에서 유명한 재벌이긴 해도 당시 2천억 원이라는 거액의 자금을 마련할 정도로 기업 규모나 시가총액 수준이 그리 높은 것은 아니었던데다 1997년 외환 위기 등의 경제적 위기 상황까지 감안하면 낙찰가 납부를 위한 자금 마련이 내부적으로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일이 반면교사가 되었는지 16년 후인 2011년 7월 5일, 강변 테크노마트 건물 진동 사고가 생기자 즉시 손님과 상인들이 철수하고 대책회의를 열며 급히 문제 분석에 들어갔다. 근데 건물주 측은 빠른 움직임을 보인데 반해 입주 상인들과 어느 대형 입점업체는 돈 한 푼이라도 벌겠답시고 철수를 곧바로 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참사로 사고 구조과정에서 지하 바닥이 드러나기 전까지 생존자가 간간이 구조되어 거의 보름간 뉴스에 삼풍 구조 소식이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지 몰라도 상당수 사고들이 세월이 지나면 잊혀지는 반면에 상당수가 기억하고 가끔씩 얘기하면서 안전불감증에 대해 몸서리치곤 할 정도로 대한민국 국민들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최악의 참사다. 그래서 이 사고에 대해 적힌 현대사 책도 있다.

실제 삼풍 참사가 발생한 지 며칠 지나지 않은 시기에 롯데백화점 영등포점에서 영업 중 정전사고가 났는데 쇼핑하던 고객들이 공포에 떨며 비명을 지르거나 기둥을 붙잡는 등 건물의 진동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극도로 불안감을 표출하는 반응을 보였다. 위에서도 언급한 2011년 발생한 강변 테크노마트 건물 진동 사고에서도 건물에 있던 사람들이 마찬가지의 불안감을 표출하게 된 것은 기본적으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의 영향이 절대적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안전불감증이 불러온 대표적 역대급 참사임에도 이런 사고가 있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교육 현장에서는 언급되는 일이 드물어졌다는 말도 있다. 그나마 대학교 공학윤리 과목에서는 필수 소재가 되어 있으며, 외국 교재에서도 자주 인용될 정도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준은 비참하게 몰락했다. 7년 간 교도소에서 살았고, 재산은 압류당하고 지인들도 관계를 끊었으며, 감옥에서 신장병에 걸려서 출소하자마자 병원에 입원했고, 결국에는 출소 6개월 만에 쓸쓸하게 골로갔다. 당시 가족들 외엔 아무도 없었다고 하는데, 그의 장례식에는 놀랍게도 큰며느리가 왔다고 한다. 불쌍하게도 이 사람은 본인도 피해자인데, 사건 후 장본인인 이준 대신에 사과했다고 한다. 여론은 이 사람도 피해자였던지라 동정했다고 한다.

당시 구조에 힘썼던 구조 대원들이 20주기를 계기로 한 자리에 모였다.

여담으로 이 사건 이후 3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사고는 19년동안 일어나지 않았으나...

법조인들 중 사법연수원 26기 출신들은 이 사고에 휘말릴 뻔 했다. 당시 사법연수원은 서초구 서초동의 서울법원종합청사 3별관에 위치해 있었다. 여긴 삼풍백화점의 바로 길 건너편이다. 사고 당시 연수생들은 예술의 전당에서 국악 공연을 관람하고 있었다.

관람을 마치고 사법연수원으로 돌아와 보니 백화점이 폭삭 무너진 걸 발견한 것. 당시 연수생들은 연수원과 가까운 삼풍백화점을 자주 방문했기 때문에 이 공연 관람이 아니었다면 개인적으로 백화점을 방문했다가 사고를 당한 사람이 생겼을 수도 있었다. 사고 이후 처음엔 삼풍주유소에 설치했던 사고수습 지휘본부를 연수원 건물로 이전했고, 연수생들도 구조대원들에게 물과 음식을 나눠주고 헌혈에 참여하는 등의 봉사활동을 행했다. 참고로 26기 출신 유명인사들로는 천종호 판사,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의원, 이미선 헌법재판관, 추리소설 작가인 도진기 등이 있다.

사고 당시 대책본부가 설치되었던 삼풍주유소는 2011년에 문을 닫았고 지금은 그 자리에 식당으로 이루어진 빌딩이 들어섰다.B동에 있었던 조흥은행 지점은 붕괴사고 이후에 백화점 밖으로 빼고 현재까지도 영업중이다. 옛 삼풍백화점 뒤쪽(삼풍아파트 후문)에 있는 신한은행 삼풍지점이 삼풍백화점에 있던 지점의 후신이다.

백화점 뒷편의 삼풍아파트의 단지 내 안내도에는 2011년까지 삼풍백화점이 표시되었으나 안내도가 교체되어 사라졌다.삼풍백화점 맞은편에 위치한 반포미도아파트 1차, 2차에는 아직도 삼풍백화점 마크가 새겨져 있는 쓰레기통이 존재한다.

쓰레기통은 1994년, 그러니까 붕괴 1년 전에 백화점 측에서 홍보용으로 아파트에 설치한 것이다.

2018년 5월 현재는 아크로비스타로 제대로 표기되었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악의 인재(人災)로 지적받는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재조명되고 있다.

27일 주요 인터넷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에는 '삼풍백화점 붕괴' 키워드가 올라왔다.

최근 방영된 tvN 드라마 '화양연화'에서 주연배우 이보영이 맡은 윤지수 역할이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로 가족을 잃는 아픔을 가진 사연이 있다는 사실이 공개되며 해당 사고에 다시금 관심이 집중된 것으로 보인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는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7분경 발생했다. 사망자는 502명, 부상자만 937명에 달하는 대형 참사였다. 실종자도 6명 발생했다. 당시 생존자 구조작업은 2주 넘도록 이뤄졌다. 20살 남성이 11일, 18살 여성이 13일 만에 구조됐고, 17일을 견딘 생존자가 구조되기도 했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는 설계에서부터 시공, 감리, 유지관리 등에서 비용절감을 위한 비리가 이어져 만들어낸 참사로 기록돼 있다. 당시 수사 결과 사고 1년 전부터 붕괴 조짐이 제기됐지만 조처가 이뤄지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진 바 있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는 올해 참사 25주기를 맞는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는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2분경 서울 서초동 소재 삼풍백화점이 부실공사 등의 원인으로 갑자기 붕괴되어 1천여명 이상의 종업원과 고객들이 사망하거나 부상당한 대형 사고였다.

설계 시에 대단지 상가로 설계되었던 것이 정밀한 구조 진단 없이 백화점으로 변경되어 1989년 완공됐다. 그 후에도 무리한 확장공사가 수시로 진행됐다.

붕괴 조짐이 있었지만 백화점은 응급조치로 대응했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는 설계·시공·유지관리의 부실에 따른 예고된 참사였다. 1년 전 성수대교 붕괴사건(1994년 10월 21일)과 함께 압축성장의 그림자였다.

지상 5층, 지하 4층, 그리고 옥상의 부대시설로 이루어진 삼풍백화점은 붕괴사고가 일어나기 수개월 전부터 균열 등 붕괴 조짐이 있었다.

1995년 6월 29일 오전에 5층에서 심각한 붕괴의 조짐이 나타났다. 경영진은 영업을 계속하면서 보수공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1천여명 이상의 고객들과 종업원들이 건물 내에 있었다. 당일 오후 6시 직전에 5층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건물은 먼지 기둥을 일으키며 20여초만에 완전히 붕괴됐다.

인명피해는 사망 501명, 실종 6명, 부상 937명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가장 큰 인적 피해였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최후의 생존자 3인 - 유지환, 최명석, 박승현.

최명석(남, 1975년생, 사고 발생 11일 만에 구조)

상당히 운이 좋은 편에 속했는데, 차차 구조 열기가 식어가면서 물도 뿌리지 않아 갈증에 시달리던 중 장대비가 쏟아져 빗물을 마셔 연명할 수 있었고, 그 다음날 에스컬레이터를 철거하던 중에 굴착기 기사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후 박승현의 고교동창을 소개받아 결혼을 했으며 대학에서 공부한 전공을 살려 GS건설에 재직중이다. 답답하고 좁고 어두운 공간에 갇혀 있는 동안 자기 주변에 떨어져 있던 장난감 기차를 발견하고는 이를 가지고 놀면서 삶의 희망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말이 가지고 노는거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최대한 고통을 잊고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필사적으로 정신을 집중하게 해준 물건이었을 것이다. 그의 옆에는 두 명의 여성도 갇혀 있어서 같이 살아나가자고 서로를 위로했지만 25세의 직원 이승연과 다른 한명의 중년 여성은 콘크리트에 깔려 부상이 심해 모두 목숨을 잃었다.

훗날 사고 당시의 일을 술회했는데, 매몰되어 있느라 깜깜해서 보이는 게 없었기에 자신의 기억은 청각이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살아 있어서, 얘기도 나누고 서로서로 힘내라고 응원도 했지만 점점 그 소리가 줄어들어 갔다고.. 전술한 소방수 때문에 익사한 사람의 마지막 말을 들었는데, 그의 유언은 "물이 차올라와요...허리까지 찼어요...그쪽은 꼭 살아 나가세요..안녕."이었고 그다음엔 '꼬르륵, 꼬르륵' 물속에서 사람이 숨이 막혀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그 소리는 평생 못 잊을 거라고..일반인과 함께 외국을 여행하는 형식의 어느 TV프로그램에 이스라엘 지역 여행자로 섭외되어 출연한 적이 있는데, 주변 지인들을 테러나 전쟁으로 여럿 잃은 경험이 있는 이스라엘 현지 청년이 ‘나는 죽음을 항상 곁에 두고 산다’고 말하자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 마음이 이해가 간다'고 말하더니 그날 밤 프로그램 PD에게 들려준 이야기다.

유지환(여, 1977년생, 사고 발생 13일 만에 구조)

구조 후에 상당히 유쾌한 모습을 보였는데 구조된 직후의 소감으로 "구조대원 오빠랑 데이트하고 싶다."하며 아이스커피가 마시고 싶다는 약간 엉뚱한 말을 해서 소소하게 웃음을 남기기도 했다. 결혼 후에 조용히 가정주부로 살아가고 있다고 알려졌다.

박승현(여, 1976년생, 사고 발생 17일 만에 구조)

1967년 청양 구봉광산 매몰사고 생존자 김창신의 16일 생존 기록을 10시간 깼다. 특히 김창신의 경우는 매몰된 상태에서 외부 연락이 가능했던 반면 박승현는 외부와의 연락이 완전히 끊긴 고립 상태에서 17일을 생존했던 것이다. 사고 직후 근로복지공단에 특채되어 '삼풍 참사 최후의 생존자' 라는 타이틀로 산업 재해 지원을 담당했으나, IMF 사태 때문에 계약직으로 전환당하면서 2000년부터 그만두게 되었다. 2005년 근황 박승현이 국내 최장 기록을 깨면서 김창신도 잠깐 화제가 되었는데 MBC와의 인터뷰에서 어린 학생이 장하기 그지 없다면서 '자신의 기록은 얼마든지 더 깨져야 한다'고 말했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마지막 생존자였다.

드라마 화양연화에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에 관한 에피소드가 다뤄졌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극중 이보영은 가족인 모친과 친동생을 잃었다.

결국 이보영 극중에서 구속된다. 이보영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가족들을 잃은 유족들에게 욕설하는 사람들과 시비가 붙기도 했다.

당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해당 그룹 회장은 물론 관계자 등 총 20여명이 형사처벌을 받았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인한 재산 피해금액은 총 2000여 억원으로 추산하고 있다.

삼풍백화점 붕괴 당시 한 방송사는 이 사고로 '악마의 미소'라고 일컬었다고 했다.

현재 삼풍백화점 붕괴 현장에는 최고급 주상복합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영상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MR5hx3khGgU&feature=emb_logo&ab_channel=%ED%83%80M%EB%A8%B8%EC%8B%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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