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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균 나이 배우 프로필 아들 와이프 부인 아내 김선희 결혼 자녀 가족

by 제로스 2023.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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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국회의원 탤런트 영화 배우 신영균 프로필

신영균 나이 학력 고향 가족관계 종교 데뷔 소속정당 군대 병역

이름

신영균(申榮均)

출생

1928년 11월 6일 (91세)

황해도 평산군 금암면 필대리3

본관

평산 신씨4

가족

배우자 김선희

슬하 1남 1녀

친손주 3명

외손주 2명

학력

서울대학교 치의학과 학사

서강대학교 명예 문학박사

데뷔

1960년 영화 '과부'

종교

개신교(침례회)

출생: 1928년 11월 6일 (91세), 북한 평산군

배우자: 김선희

학력: 서울대학교

자녀: 신언식, 신혜진

저서: 제주신영영화박물관

신영균 영화배우, 전 국회의원

출생

1928년 11월 6일, 황해도 평산

학력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데뷔

1960년 영화 '과부'

수상

2020년 제56회 대종상 영화제 공로상

2011년 제2회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

경력

2012.02 새누리당 상임고문

한주홀딩스코리아 명예회장

출생일 1928년 11월 6일 (91세)

출생지 일제 강점기 황해도 평산군 금암면 필대리

별명 호(號)는 평주(平洲)

연극배우 데뷔 초기 예명은 신일천(申一川)

종교 개신교

정당 무소속

부모 신태현(부)

영월 신씨 신순옥(모)

배우자 김선희

자녀 신언식(아들), 신혜진(딸)

학력 1955년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치의학사

1956년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1기

복무 대한민국 해군

복무 기간 1953년 3월 ~ 1958년 3월

최종 계급 대한민국 해군 대위

근무 군의관

지휘 군의관 군의무장교 공중보건의

주요 참전 한국 전쟁

서훈 내역 은관문화훈장

신영균(申榮均, 1928년 11월 6일 ~ )은 대한민국의 영화배우 겸 연극배우(연기자)와 가수 분야에서 모두 은퇴한 치과의사 출신의 기업가이자 영화기획가 겸 영화제작자이고 예술기관단체인을 지낸 대학 교수 겸 前 정치가이며 예비역 대한민국 해군 대위이다. 그의 현재 주요 거주지는 제주도 제주이다.본관은 평산(平山)이고 호는 평주(平洲)이며 데뷔 초기에는 신일천(申一川)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했다.1947년 연극배우로 첫 데뷔하였고 이듬해 1948년 영화 《검사와 여선생》으로 영화배우 데뷔하였다.

신영균 아들 신언식 직업 아버지 아빠

그의 아들 신언식은 기업인이며 한국 맥도날드 사장이다.

1928년 11월 6일 황해도 평산군의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아버지 신태현과 어머니 신순옥의 차남으로 태어났다.1 초등학교 3학년 때 경성부(서울)로 이사해 동대문구 흥인초등학교를 다녔고, 한성고등학교 재학 시절에는 연극부에서 활동했다.1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예원좌의 후신인 청춘극장에 입단해 2년 동안 신극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경제적으로 너무 쪼들렸고, 연극은 취미로 하고 생계를 꾸려갈 수 있는 직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에 입학했다.1 서울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한국 전쟁이 발발하였고, 피란간 부산에서 전시연합대학을 다닐 때도 연극을 해서 생활비에 보탰다.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연극부를 창립하여 연극부장으로서 공연활동에 빠져들었다. 신영균 군대 병역 1955년, 서울대학교를 졸업하였는데 이미 2년 전인 1953년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대한민국 해군 중위(군의무장교)로 임관하였고, 1958년 대위로 전역하였다.

신영균 리즈 과거사진 과사 젊은시절

서울대학교 치대 재학시절 연극을 했던 인연으로 친분있는 연극인들이 찾아오게 되고 연극을 하자는 권유가 늘어갔고, 연극에 대한 열정을 억누를 수 없었던 신영균은 연극 《여인천하》에서 조광조 역을 맡아 무대에 오르게 된다. 당시, 영화 《과부》의 주인공을 물색하던 조긍하 감독이 그 무대를 보게 되고 영화계 진출을 적극적으로 권하게 된다. 1960년, 조긍하 영화감독의 제안으로 32세의 늦깍이 나이에 영화 《과부》에서 머슴 '성칠이' 역을 맡아 영화계에 전격 데뷔하였다. 이어 출연한 《마부》가 한국 영화사상 최초로 1961년 베를린 영화제에서 특별은곰상을 수상하고, 1962년에는 《연산군》으로 제1회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차지하며 데뷔 2년 만에 연기파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국내외 유수의 영화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휩쓸었다. 그리고 1964년에는 그의 히트작인 《빨간 마후라》로 제11회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으면서 국제적으로 통하는 배우라는 인상을 대중들에게 심었다.7 1960년부터 1978년 배우 은퇴하기 까지 《과부》, 《연산군》, 《열녀문》, 《갯마을》, 《시장》, 《빨간 마후라》, 《미워도 다시 한번》, 《삼일천하》등 주옥같은 작품을 비롯하여 총 294편의 영화에 출연하여 1960~70년대 영화계의 톱스타로 군림했다.

배우 시절 영화배우라는 직업을 늘 불안하게 여겼던 그는 1963년, 친구와 함께 서울 금호동에 동시 상영을 하는 ‘금호극장’을 인수하여 새로 개관하였다. 이후 명보극장 바로 옆에 있는 명보제과를 인수하여 이때 부인 김선희 여사가 팔을 걷어붙여 직접 빵을 굽고 장사도 하면서 사업을 키워 나갔다.8 당시 명보제과는 뉴욕제과와 태극당, 풍년제과 등과 함께 4대 제과로 꼽힐 정도였다고 한다. 1971년에는 볼링장을 인수하였고, 1973년에는 빌딩관리업체인 '한주흥산 주식회사'를 설립하여 부동산임대사업에까지 뛰어들어 영화배우 못지않은 사업수완을 보였다.10 1977년 8월에는 명보제과 바로 옆에 있는 명보극장을 7억 5천만원을 들여 사들인 이후, 《지옥의 묵시록》과 《빠삐용》 등의 외국 영화와 《내가 버린 여자》, 《별들의 고향 2》, 《미워도 다시 한번》 등의 한국영화를 배급·상영하여 대박을 터뜨렸다. 1985년, 서울 종로구 관훈동에 지상 14층 지하 4층의 빌딩을 건립하고 지하 2,3층에 명보소극장을 차렸다. 1992년에는 한국에 진출하려는 미국 외식패스트푸드업체인 맥도날드사와 신영균이 함께 49 대 51의 비율로 54억원의 자본금을 투자하여 서울에 합작회사인 '맥신산업'을 설립하였다.

 

탈렌트 배우 신영균 영화 드라마 연극 제작 출연작 작품활동 필모그래피

출연작

영화

1948년 《검사와 여선생》

1960년 《과부》 ... 성칠 역

1960년 《꿈》 ... 조신 역

1961년 《마부》 ... 수업 역

1961년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 외삼촌 역

1961년 《당쟁비화》

1961년 《바보 온달과 평강 공주》 ... 온달 역

1961년 《상록수》

1961년 《서울의 지붕 밑》

1961년 《어부들》

1961년 《5인의 해병》 ... 오덕수 소위 역

1961년 《일편단심》

1961년 《임꺽정》

1961년 《정부》

1961년 《정조》

1962년 《연산군》 ... 연산군 역

1962년 《화랑도》 ... 어진랑 역

1962년 《노란 샤스 입은 사나이》

1962년 《동경서 온 사나이》

1962년 《동학난》 ... 순구 역

1962년 《부라보 청춘》

1962년 《붉은 장미의 추억》

1962년 《비밀 통로를 찾아라》

1962년 《사랑과 미움의 세월》 ... 오 사장 역

1962년 《사랑을 다시 하지 않으리》

1962년 《사랑의 동명왕》 ... 동명성왕 역

1962년 《산색시》

1962년 《상한 갈대를 꺾지 마라》

1962년 《신입사원 미스터 리》

1962년 《12인의 야도》

1962년 《아카시아 꽃잎 필 때》

1962년 《악인은 없다》

1962년 《억세게 재수 좋은 사나이》

1962년 《여자의 일생》

1962년 《열녀문》

1962년 《원한의 일월도》

1962년 《인간 만세》

1962년 《인목대비》 ... 능양군 역

1962년 《잊을 수 없는 애정》

1962년 《전쟁과 노인》

1962년 《주유천하》 ... 양녕대군 역

1962년 《천하일색 양귀비》

1962년 《태양을 등진 사람들》 ... 인성 역

1962년 《평양 기생 계월향》

1962년 《폭군 연산》 ... 연산군 역

1962년 《흑두건》

1962년 《칠공주》

1963년 《로맨스 그레이》

1963년 《쌀》

1963년 《강화도령》 ... 이원범 역

1963년 《나는 비밀이 있다》

1963년 《보은의 구름다리》

1963년 《사랑은 주는 것》

1963년 《쌍검무》

1963년 《5인의 독수리》

1963년 《정복자》

1963년 《죽도록 사랑해서》

1963년 《철종과 복녀》 ... 철종 역

1963년 《한양에서 온 성춘향》

1963년 《혈맥》 ... 형 역

1963년 《횃불》

1964년 《가야금》

1964년 《석가모니》

1964년 《나는 속았다》

1964년 《남이 장군》 ... 남이 역

1964년 《단장록》

1964년 《달기》 ... 주왕 역

1964년 《목숨보다 더한 것》

1964년 《벽오동 심은 뜻은》

1964년 《빨간 마후라》 ... 나관중 소령 역

1964년 《사자성》 ... 황포 역

1964년 《십년세도》 ... 홍국영 역

1964년 《아편전쟁》

1964년 《여장부》

1964년 《월급봉투》

1964년 《잉여인간》

1964년 《진성여왕》

1964년 《처녀성》

1964년 《천안삼거리》

1964년 《평양 감사》

1964년 《형부와 새언니》

1964년 《황금벌판의 혈투》

1964년 《모녀 기타》 ... 남편 역

1965년 《모녀봉》

1965년 《갯마을》

1965년 《남과 북》 ... 장일구 역

1965년 《가시나이》

1965년 《광야의 호랑이》

1965년 《남아 일생》

1965년 《막내딸》

1965년 《명동 44번지》

1965년 《불나비》

1965년 《빗 속에 지다》

1965년 《사르빈가에 노을이 진다》

1965년 《살아야 한다》

1965년 《살인 명령》

1965년 《상해 55번지》

1965년 《성난 독수리》

신영균 가족사진 부인 아내 배우자 와이프 김선희 사진 신영균 자녀 딸 아들 사진 어린시절

1965년 《슬픔이여 잘 있거라》 ... 중길 역

1965년 《시장》

1965년 《압록강아 말하라》

1965년 《언제나 그날이면》

1965년 《예기치 못한 사랑》

1965년 《왕과 상노》 ... 만강 역

1965년 《용사는 살아있다》

1965년 《인천상륙작전》

1965년 《잃어버린 세월》

1965년 《무관의 제왕 장보고》

1965년 《저 하늘에도 슬픔이》 ... 김동식 역

1965년 《정조성》

1965년 《제3의 운명》

1965년 《처가살이》

1965년 《청계천》

1965년 《태조 이성계》

1965년 《피어린 구월산》

1965년 《해병특공대》

1965년 《홍도야 울지 마라》

1966년 《군번 없는 용사》

1966년 《꽃가마》

1966년 《무명초》

1966년 《물레방아》

1966년 《병사는 죽어서 말한다》

1966년 《비밀 첩보대》

1966년 《산유화》

1966년 《순애》

1966년 《악몽》

1966년 《여자이기 때문에》

1966년 《이별의 강》

1966년 《잘 있거라 일본 땅》

1966년 《적선지대》

1966년 《죽은 자와 산 자》

1966년 《청춘행진곡》

1966년 《탈출 명령》

1966년 《평양 기생》

1967년 《고별》

1967년 《공주 며느리》

1967년 《꿈》 ... 조신 역

1967년 《내 몫까지 살아주》

1967년 《냉과 열》

1967년 《네 자매》

1967년 《단발머리》

1967년 《돌지 않는 풍차》

1967년 《두 나그네》

1967년 《뜨거운 안녕》

1967년 《마적》

1967년 《마지막 요일》

1967년 《망향천리》

1967년 《문정왕후》

1967년 《방콕의 하리마오》

1967년 《비서실》

1967년 《산》

1967년 《산불》

1967년 《상감마마 미워요》

1967년 《서울 아줌마》

1967년 《수라문의 혈투》

1967년 《암행어사》

1967년 《애인》

1967년 《애하》

1967년 《인조반정》

1967년 《장렬 509 대전차대》

1967년 《종자돈》

1967년 《천도화》

1967년 《철면 황제》

1967년 《청사초롱》

1967년 《칠부열녀》

1967년 《통금 5분전》

1967년 《풍운 삼국지》

1968년 《대원군》

1968년 《미워도 다시 한번》 ... 신호 역

1968년 《철부지 아씨》

1968년 《과도의 검》

1968년 《규방》

1968년 《낮과 밤》

1968년 《독수공방》

1968년 《로맨스 마마》

1968년 《맨발의 영광》

1968년 《목가》

1968년 《무숙자》

1968년 《바람 같은 사나이》

1968년 《방랑대군》

1968년 《방울대감》

1968년 《사랑》

1968년 《사랑했는데》

1968년 《소라의 꿈》

1968년 《언니의 일기》

1968년 《여마적》

1968년 《순정》

1968년 《일본인》

1968년 《자주댕기》

1968년 《찬란한 슬픔》

1968년 《천하장사 임꺽정》

1968년 《칼맑스의 제자들》

1968년 《탈출 17시》

1968년 《파문》

1968년 《팔도강산 2》

1968년 《풍랑객》

1968년 《풍운아》

1968년 《하얀 곰》

1968년 《랑》

1968년 《효자문》

1969년 《미워도 다시 한번 2》 ... 신호 역

1969년 《이조 여인 잔혹사》

1969년 《검은 야회복》

1969년 《남 몰래 흘린 눈물》

1969년 《내시 2》

1969년 《내실》

1969년 《눈물을 감추고》

1969년 《당신》

1969년 《당신의 뜻이라면》

1969년 《목메어 불러봐도》

1969년 《못잊어》

1969년 《별은 멀어도》

1969년 《봄 봄》

1969년 《사랑은 가고 세월만 남아》

1969년 《사랑이라는 것은》

1969년 《서울 야화》

1969년 《성녀와 마녀》

1969년 《세월이 흘러가면》

1969년 《여진족》

1969년 《요화 장록수》

1969년 《울고 가는 외기러기》

1969년 《유혹》

1969년 《육군 김일병》

1969년 《250조》

1969년 《잊혀진 여인》

1969년 《잔혹한 청춘》

1969년 《저 눈밭에 사슴이》

1969년 《젊은 여인들》

1969년 《정과 애》

1969년 《천년호》

1969년 《청춘을 다 바쳐》

1969년 《한 목숨 다 바쳐》

1969년 《형》

1970년 《세조대왕》

1970년 《거북이》

1970년 《결혼 대작전》

1970년 《그 분이 아빠라면》

1970년 《기러기 아빠》

1970년 《두 여인의 집》

1970년 《떠나야 할 사람은》

1970년 《명동 가시나》

1970년 《무영탑》

1970년 《버림 받은 여자》

1970년 《벽 속의 여자 2》

1970년 《비운의 왕비》

1970년 《세상만사 뜻대로》

1970년 《숨겨논 여자》

1970년 《슬픔을 외면할 때》

1970년 《약속은 없었지만》

1970년 《어느 소녀의 고백》

1970년 《아빠 엄마 오래 사세요》

1970년 《여인의 종착역》

1970년 《왜 여자만이 울어야 하나》

1970년 《울고 간 여인》

1970년 《유정무정》

1970년 《이별의 15열차》

1970년 《저것이 서울의 하늘이다》

1970년 《저 하늘에도 슬픔이 2》

1970년 《처와 처》

1970년 《청춘무정》

1970년 《태조 왕건》

1970년 《한 많은 남아 일생》

1970년 《호피 판사》

1970년 《미워도 다시 한번 3》 ... 신호 역

1971년 《미워도 다시 한번 4》 ... 신호 역

1971년 《무정의 네온가》

1971년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1971년 《청산에 우는 새야》

1971년 《암흑가의 공포》

1971년 《대감신랑》

1971년 《늦기 전에》

1971년 《형 2》

1971년 《죽도록 사랑했노라》

1971년 《친정 아버지》

1971년 《내실 사모님》

1971년 《미워도 정 때문에》

1971년 《처복》

1971년 《짚세기 신고 왔네》

1971년 《빗 속에 떠날 사람》

1971년 《잠들면 떠나주오》

1971년 《빨간 마후라의 사나이》

1971년 《세 남매》

1972년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1972년 《집을 나온 여자》

1972년 《아빠라 부르는 연인》

1972년 《사랑하는 아들 딸아》

1972년 《여선생》 ... 채화 부 역

1972년 《궁녀》

1972년 《이 밤이여 영원히》

1972년 《인생은 나그네길》

1972년 《기로》

1972년 《인간 낙제생》 ... 송달준 역

1972년 《헤어져도 사랑만은》

1973년 《딸부잣집》

1973년 《해벽》

1973년 《삼일천하》 ... 김옥균 역

1973년 《천사의 메아리》

1973년 《잡초》

1973년 《고향에 진달래》

1974년 《캐서린의 탈출》

1975년 《애수의 샌프란시스코》

1976년 《아라비아의 열풍》

1977년 《저 높은 곳을 향하여》

1979년 《화조》

연극

2012년 《하얀 중립국》

텔레비전 드라마

1973년 TBC 동양방송 드라마 《북간도》

1995년 SBS 서울방송 드라마 《아스팔트 사나이》

영화 제작 작품

1988년 《그 마지막 겨울》

1988년 《둥지 속의 철새》

신영균 고향

대한민국의 배우, 정당인이다.1928년 11월 6일, 황해도에서 태어난 실향민이다. 자라면서 연기에 꿈을 가졌지만 공부도 잘해서 진로를 두고 고민하다가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을 지원해 합격했다. 군의관으로 복무하며 현재의 배우자를 만나고, 개인 병원을 개업해 많은 돈을 벌었지만 연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연극무대에 섰고, 이어서 영화에 출연해 오늘날의 레전드가 되었다고 한다. 남성적이면서 지적인 이미지 덕분에 주인공으로 감독들이나 제작자들 사이에서 선호도가 높아 다소 무리를 감수하면서도 다작을 하게 되었다고. 선이 굵은 미남형 얼굴에다 당대의 인기 배우로서는 드물게도 거의 스캔들을 일으키지 않았다. 일설에 따르면 연기자로 전향할 당시 부인에게 '바람을 피우지 않겠다'고 서약서를 썼다는데, 서약서를 썼다고 다 그 내용대로 행동하지는 않으므로 원래 성품 자체가 그러한 듯하다.

원로 영화배우 중 김지미와 더불어 배우 생활은 물론이고 개인 사업으로도 굉장히 성공한 인물이다. 1977년에는 명동의 랜드마크 격인 명보극장을 인수했고, 1991년에는 맥도날드의 한국 법인인 신맥을 설립하는 등 현금으로만 500억을 상회하는 개인 재산을 보유하고 있고, 원로 배우 상당수가 그러했듯이 예총 회장을 거쳐 연예계 몫으로 신한국당, 한나라당 전국구 국회의원을 두 차례 지내기도 했다. 다만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성동구 병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통일민주당 박용만에 밀려 낙선하였다.

2010년, 당시 500억 원 상당의 가치를 가진 명보극장과 제주도 신영영화박물관을 영화계, 예술계의 공유재산으로 기증해 모처럼 영화계의 좌우합작을 이끌었고,서울대에 발전기금으로 100억 원 상당의 토지를 기부하기도 했다.2012년에는 이순재, 심양홍 등 서울대 연극동아리 출신 후배들과 함께 '하얀 중립국'이라는 연극에 출연해 대중들에게 모처럼 배우로써의 존재감을 보였다.

신영균 재산 기부

원로배우 신영균(91)이 남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밝혀 화제다.신영균은 12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영화계 지원과 후배 육성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겠다"며 이 같은 의사를 전했다.1960~70년대 대스타로 활약을 펼쳤던 그는 앞서 2010년 명보극장(명보아트홀)과 제주 신영영화박물관 등 500억 원 규모의 재산을 한국 영화 발전에 써달라며 내놓은 바 있다. 모교인 서울대에도 시가 100억 원 상당의 대지를 발전기금으로 기부했다.

그는 "1960~70년대에는 내 영화를 맘껏 틀 극장이 너무나 갖고 싶었지만 이제는 욕심이 없다. 마지막으로 내가 가지고 갈 것은 40~50년 손때 묻은 이 성경책 하나"라고 말했다.신영균의 기부를 토대로 지난 2011년에는 신영균영화예술재단이 출범한 바, 이 재단은 수익금으로 영화인 자녀 장학금을 지급하고, 단편영화 제작 지원을 하는 것은 물론 '아름다운 예술인상' 시상식을 통해 연극·영화계 인사들의 공로나 선행을 격려하고도 있다.

서울대 치의학과를 졸업한 신영균은 배우로 전향해 영화 '과부'로 본격적으로 배우의 길을 걷게 됐다. '상록수', '연산군', '빨간마후라', '미워도 다시 한번' 등 300 여편의 작품에 출연했다.

신영균 스캔들 전여친? 불륜 이혼 과거 재혼 여자친구 린다이 사망

신영균 린다이 스캔들

195-60년대 홍콩 최고의 여배우였던 임대(林黛, Linda Lin Dai)5가 1967년 갑작스레 자살했을 당시 신영균에게 고백한 사랑이 거절당하자 괴로워하다 죽음을 결심했다는 소문이 몇몇 미디어에 보도되기도 했는데, 이는 사실무근이다. 임대와 신영균은 홍콩의 쇼 브라더스와 한국의 신필름의 합작 영화 달기에서 같이 연기했던 적이 있다. 다만 신영균은 촬영 중 린다이가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한 것은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60년 영화인생의 유일한 스캔들이 있었다. 홍콩의 유명 여배우 린다이(林黛)와의 염문설이다.1964년 3월, 나는 ‘빨간 마후라’의 엔딩 장면(적탄에 맞아 죽는 장면)을 찍고 곧장 공항으로 달려갔다. 한국과 홍콩의 합작영화인 ‘비련의 왕비 달기’ 촬영차 홍콩으로 날아갔다. 나는 중국 은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 역을, 린다이는 주왕의 애첩 달기 역을 맡았다. 달기는 희발(남궁원)을 사랑하면서도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고 주왕의 후비가 되고, 감언이설로 주왕을 더욱 포악하게 만든다는 캐릭터였다.

우리는 70일간 촬영하면서 동료 배우로서 가까워졌다. 린다이는 당시 톱스타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지만 남모르는 고민이 있었는데 바로 남편 문제였다. 한 주먹 하는 남편의 폭력성 때문에 힘들어하더니 영화 촬영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홍콩과 한국 언론에서 그녀의 죽음을 집중적으로 다뤘고 급기야 나와 관련이 있다는 기사까지 터졌다. 나를 사모해서 사랑 고백을 했지만 거절당하자 삶을 비관한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나는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지만 고인에게 누가 될까 봐 아무런 해명도 하지 못했다. 내가 알고 있는 진실은 이랬다. 한창 영화를 찍던 중에 린다이와 나눈 대화가 기억난다. 상대방 언어는 몰랐지만 영어와 보디 랭귀지를 섞어서 소통하곤 했다.

린다이=“저는 정말 사랑에 빠져버렸어요.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요.”

나=“이봐 린다이, 나는 가정을 가진 사람이야. 와이프가 있어.”

린다이=“무슨 상관이에요. 홍콩에선 관계없어요. 그분은 한국 와이프이고 여기서는 제가 당신 와이프를 하면 되잖아요.”

영화 촬영 내내 아내는 홍콩에서 내 스케줄 관리 등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가정불화를 겪던 린다이로서는 다정한 우리 부부가 적잖이 부러웠던 모양이다. 나만큼이나 린다이와 가깝게 지낸 아내는 이런 해프닝도 너그럽게 이해해주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건 아내가 제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촬영을 마치고 한국에 들어왔는데 린다이에게서 연락이 왔다.

“한국이 어떤 곳인지 궁금해요. 저도 꼭 한번 가보고 싶어요.”

“그래요, 잘 대접할 테니 언제든 오세요.”

이런 말을 주고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를 영영 볼 수 없게 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안타깝고 비통했지만 나는 린다이의 장례식조차 가보지 못했다. 나중에 만난 그의 동료 배우 리리화(李麗華)는 “린다이가 당신을 얼마나 생각했는데 장례식조차 안 왔느냐”며 나를 나무랐다.

하지만 나로선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녀의 죽음이 나와 관련이 있다는 오해를 받는 상황이었기에, 섣부른 행동을 할 수가 없었다. 혹여 내 아내가 상처를 받진 않을까 걱정됐고, 그녀의 남편을 비롯한 유가족의 얼굴을 보기가 두렵기도 했다. 또 한편으로는 정말 나 때문에 가정불화가 심해진 건 아닐까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이유가 어찌 됐든, 저세상에서 그녀를 만나면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다.

신영균 부인 아내 와이프 직업 김선희 결혼

신영균 결혼 29세 때, 7세 연하로 이화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재학중인(신영균 부인 아내 직업 김선희) 아내 김선희와 해군 군의관 시절 만난 지 1년 만에 결혼했고, 치과의사 면허자격을 딴 뒤 1958년 서울 회현동에 ‘동남치과’를 개업했다. (신영균 부인 아내 나이 차이 신영균보다 7살 연하) 신영균 자녀 자식 아이 아기 딸 아들 1남 1녀를 두고 있다.아들 신언식은 기업인이며 한국 맥도날드 사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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